누가 어떻게 해서 주교가 되는지 그 구체적인 경로와 절차를 나는 잘 모른다. 한 사람이 사제가 되는 데는 ‘하늘의 부르심’(聖召)과 그에 순응하는 본인의 의지가 결정적인 요건이라 배웠거늘 주교는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뿐이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성령만이 하시는 일일 터다. 요즘 우리 교구 신부들 사이에 인천교
어제 아침부터 조짐이 약간 이상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개도 안 물어간다는 오뉴월 감기에 걸려 팽팽 코 푼 휴지가 휴지통에 그득하다. 내 꼴이 영 말씀이 아니다. 오늘이 베네딕도 아빠스, 내 주보성인 축일인데. 실은 지난달부터 사목회 총무가 내 눈치를 살살 봐가며 조심스레 내 의사를 타진해왔다. 내가 그렇게 말 한마디도 눈치 보며 건네야 하는 껄끄러운
얼마 전에 내가 쓴 “신부님들은 왜 아무 것도 안하세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한 순간에 휴지쪽이 되어버린 적이 있다. 그 다음날 저녁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드린 시국미사에 신자와 시민들이 3만여 명이나 모여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우리 보좌 김태영 신부님은 거의 매일 촛불집회에 나갔다. 거기서 우연히 만난 여교우 한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뜬금없이 편지를 드리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릴 말씀은 신부님의 본당에 교적을 두고 있을 한 신자에 관한 문의입니다. 그런데 실은 제가 그분이 속한 교구와 본당을 모르니 그것이 신부님의 함자를 못 쓰고 막연히 ‘000의 본당신부님께’ 라고 쓴 까닭입니다. 올해 54세 된 어청수 프란치스꼬라는 분입니
내 눈에서 주체할 수 없도록 눈물이 흐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때와 장소에서였다. 독자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나는 스페인에 머무는 만 49일 동안 일행 중 한분의 전화를 통하여 얻어 들은 제18대 총선의 한나라당 압승 소식 밖에는 국내 소식을 접한 게 없으니 시청앞 서울광장을 꽉 메운 촛불들의 군무를 보고 감격에 겨워 흘린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특히나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에게. 굳이 돈 써가며 먼 유럽에까지 가서 고행길(?)을 걷겠다는 건 허영이요 사치가 아니냐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거 기껏 준비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 그렇게 미안하고 죄스러우면 아예 처음부터 덤벼들지를 말았어야지. 하긴 내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우리(신품 받고 첫 발령을 받아 우리 본당에 온 새 보좌신부와 나)는 오전 7시에서 7시 반 사이에 아침을 먹는데 메뉴는 늘 누룽지다. 아주머니가 출근하기 전이므로 전날 저녁에 준비해둔 누룽지를 끓여 김치하고 같이 먹는다. 누룽지는 죽하고는 달리 벌써 몇 년을 넘게 먹는데도 물리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는 김태영 신부가 누룽지에 김치를
뜻밖에 문규현 신부는 거기 있었다. 문규현이 글을 쓰고 홍성담 화백이 그림을 그려 함께 만든 책 출판기념 전시회장.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일원으로 지금쯤 한강변을 따라 경기도 양평 어디쯤을 걷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정동 품사랑 갤러리에서 여전히 반백이 넘은 짧은 머리와 다듬지 않은 수염이
지난 설에 만난 동생이 내게 이런 충고를 했다. “형은 이제 욕하고 비판하는 글 좀 그만 써. 만날 그런 글만 쓰면 싫은 소리 듣잖아.” “어? 아닌데. 남을 욕하거나 비판하는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쓰는 거잖아. 내가 성찰하고 내가 반성한다고.” “그게 그거지. 암만 아니라고 해도 보는 사람은 다 알아
써놓고 보니 꼭 무슨 선정적인 영화 제목 같다. 아무튼 어느 날 모처럼 만난 그분이 내게 한 고백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남편과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하자면 소설을 열두 권 써도 모자랄 겁니다.” 내 친구가 올해 환갑이 되니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부부로 함께 산지 족히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신부님이
설이다. 오늘 낮에는 백령도에 사는 친구 부부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닌다는, 올해로 스물여섯이 된 딸을 데리고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싱싱한 전복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백령도는 내가 꼭 20년 전에 발령받아 2년을 살던 곳인데 아직껏 잊지 않고 찾아주다니 난 참 복도 많다. 저 아이가 그때 우리 성당 성모유치원에 다니던 그 아이였나? 예쁘게도 컸구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새 간판을 달고 소매를 걷어 붙인지 한 달이 넘으면서 경제를 살리겠다는 당선자의 호언장담은 시나브로 빛을 잃어가고 대신에 불안감만 더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발표되는 정부조직 개편안이나 정책결정사항들을 보면 대부분 국가의 장래를 내다보기보다는 코앞의 문제에만 급급하고 매사에 무척 성급하다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여타의 부서에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눈이 하루 종일 푸짐하게 왔다. 아침에는 교통대란이었다. 본당 직원들도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출근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미사를 보좌신부에게 맡기고 인천 기차길옆작은학교의 인형극단 이 공연하는 인형극을 보러 갔던 것이다. TV화면이나 영화를 통해서가 아닌 공연장의 인형극 구경은 생전 처음이다. 내가 지금 이 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벌써 “너나 잘 하세요”하는 핀잔을 듣는 것 같아 귀가 간질간질하다.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주제넘게 시건방진 훈계나 특정 인물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사제생활 32년 째 자그마치 열세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나의 시행착오와 잘못들에 대한 뒤늦은 성찰이라고 보아주면 좋겠다. 요즘이 여러 교구의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명동 거리에는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었다. 우리는 명동 지하성당에서 나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름한 대폿집을 찾아 소주를 마셨다. 신학교 동기인 서울교구 정치윤 신부가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떴다. 아직 환갑이 안 된 나이, 제의를 입힌 그의 시신이 누워있는 지하성당은 날씨보다 더 무겁고 침울했다. 교우
ooo 주교님께 새해인사를 올립니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CEO 출신 이명박씨가 도덕적으로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내세워 대통령이 됐습니다. 이것은 1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어쩌면 향후 우리 사회가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살벌한 격투장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새 대통령은 이제 서울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송두리째
일전에 몇몇 선후배 동무들과 함께 소백산에 갔는데 하필이면 입산금지기간이라 산은 오르지도 못하고 산자락에 있는 황보 선생님네 과수원에서 맛난 오가피술만 잔뜩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신부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참 이상하지요? 집에 돌아온 바로 그 다음 날, 신부님이 내신 책 (햇빛출판사 간)를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대권 도전을 포기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선언한 김근태 의원이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가 떨어질 줄 모르는 여론조사를 보고 우리 국민들이 노망들었나보다, 고 해서 한 때 일부 언론과 한나라당이 발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 심정이 꼭 김근태 의원과 같으니 어쩌면 좋으랴. 이 글이 발표될 때쯤이면 이미 대선이 끝나서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이명
내게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90년대 중반, 내가 인천 제물포본당에 있을 때 석탄일을 맞아 성당 입구에 예쁜 연등을 달고 “봉축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쓴 리본을 달아놓았다.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먼저 시도한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주일미사 때 교우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교우 한 분(전에 사목회장을 역임하신 분)이
전에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부활, 성탄 판공성사를 거른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고해성사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근래에 와서는 아예 고해성사 때문에 성당에 못 가겠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수원교구 설문조사에 의하면 자그마치 쉬는 신자의 39.6%가 냉담의 원인을 ‘고해성사가 불편해서’라고 응답했다.(가톨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