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성탄 밤미사의 문을 여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그 빛이 이 글을 보시는 분들과 그 가정을 밝게 비춰 주시기를 청하며 글을 시작해 봅니다. 월요일에 교구에 있는 한 수녀원을 찾았습니다. 거기에 계신 수사님께 고해성사를 드리기 위해서이지요. 대림시기 내내 판공성사를 드리느라 정작 제 영혼은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기에 부산에 내려오는 김에 고해성사를 드려야겠다 마음먹고 수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게 고해성사를 드리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니 그 수사님께서도
필리피서 4장 4-5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Gaudete in Domino semper. Iterum dico: Gaudete!)-을 인용한 오늘 입당송의 노래처럼 교회는 오늘 대림 제3주일을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로 지냅니다. 회개와 참회를 상징하는 자색과 기쁨과 축제를 상징하는 백색 사이에 있는 장미색, 평소에는 보기 힘든 사제의 그 장미색 제의가 상징하듯 장미 주일이라고 불리는 대림 제3주일에 교회는 다가오는 성탄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끔 우리를 인도합니다. 기쁨. 우리가
이번 주일 교회는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를 맞게 됩니다. 주님 탄생의 그 밤에 들을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그 말씀처럼 대림시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게 됩니다. 판공성사를 보고,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의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세상의 빛으로 오실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각자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대에도 대림환이 놓여 있습니다. 매주 초를 하나씩 켜면서 빛이신 예수님
지난 9월 ‘유사종교현상과 사목적 배려’라는 주제로 교구 사제 연수가 있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소위 신천지 현상 전에도 이러한 유사종교에 대한 피해는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 왔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돌아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유사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극적 성경 해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단체의 이익을 위해 폄훼하거나 곡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장면이나 사도들의 권고,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서들의 전체 맥락을 무시하고 자신들
이번 주일의 복음은 주님께서 자캐오를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자캐오의 집에 머물려고 하시자 사람들은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루카 10,7) 하며 투덜거렸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죄인이라고 ‘단정 지어진’ 사람들을 만나실 때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복음서에서 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레위라고 기록되어 있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드실 때, 함께 자리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보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에게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본당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왔습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교우 분이 천 명이 넘는 큰 성당에 있다가 저녁 일곱 시만 되면 어두컴컴한 밀양의 어느 조용한 시골로 말입니다. 이 글을 쓰는 기준으로 감물생태학습관에 부임한 지 2주째가 되었습니다. 아직 보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많이 달라진 삶을 체험합니다. 많을 때는 300명이 넘는 교우 분들과 함께 큰 성전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이제는 조그만한 경당에서 관장신부님과 직원, 봉사자 두세 분과 함께 아침 6시 반에 성무일도와 함께 미사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
지난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본당의 구역장, 반장님들과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본당에서 가장 많은 봉사를 하시는 분들 중 하나인 구역분과에 속하신 봉사자 분들과 용수성지, 대정성지 등 제주교구 순례지와 함덕 해수욕장, 섭지코지 등 제주도의 아름다운 곳도 함께 느끼고 왔습니다. 이틀째 오전의 일입니다. 마라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니 교구 사제 정기 인사가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령에 따라 저도 임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양산 성당에 온 지 9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의 남은 하루 반나절은 의도치
오늘 교회는 이 땅의 순교성인들을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대축일을 맞을 때마다 마음을 새로이 다지게 됩니다. 광헌아우구스티노. 6살에 동생과 함께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당시 본당 수녀님이 지어 주신 세례명입니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지요. 제 동생의 세례명은 광렬요한, 이광렬 요한 성인입니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형제 성인을 세례명으로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릴 땐 참 이 세례명이 낯설었습니다. 길기도 하고 주위에선 같은 세례명을 쓰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딱 두 분 만났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막론하고 참 많이 듣는 이야기, 참 많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유명했던 책 제목도 있지요. 오늘 글과 맥락은 다르지만 한 정신건강의가 쓴 "상처받을 용기" 그리고 어느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명해지게 된 책 "미움받을 용기".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은 2권까지 출간되면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던 책입니다. ‘상처받음’의 문제. 이 문제는 본당을 비롯한 신앙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세상 속에서 받은 상처를 하느님의 위로로 치유하러 오는 하느님의 집인데도 그곳에서 마저 상처를 입는
지난해 8월 우연히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이곳에 강론을 기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매주 기고하는 것이 아님을 천만다행으로 여기면서 주일이 지나고 월요일, 화요일이 되면 벌써부터 이번 주는 어떤 내용으로 풀어 나가야 할까 하는 걱정이 여전히 유효함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것이 꽤나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쓴 것이 지난해 연중 19주일이고 이번 주일이 연중 제21주일이니 꼬박 1년이 되었습니다. 코너의 제목을 ‘삶으로 말씀 읽기’라고 정한 것은
여름은 여름인가 봅니다. 날씨가 무덥습니다. 때론 습기가 그 더위의 위력을 더 가중시켜 주는 듯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더위를 참 많이 타고 땀을 많이 흘려서 여름이 괴롭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을 경우가 허다하지요. 가끔 장백의를 보고 본당 수녀님께 죄송한 마음을 느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심할 때는 클러지셔츠(신부님들이 입는 셔츠)를 하루에 한두 번 갈아입을 때도 있습니다. 이 무더위 속에서도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하는 여러분들의 발걸음을 응원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기를 기도
기억 하나초등학교 시절 매주 복사단 회합을 하면 기도와 활동을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취지는 하루에 묵주기도 5단을 바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 변질됐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 복사들 사이에서 묵주기도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관건은 누가 한 주에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느냐였습니다. 시작은 당시 단장이었던 형이 하루에 10단씩 총 70단을 하고 나니 누구는 백 단 누구는 이백 단씩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학생들이 학교와 학원을 다니면서 1주일에 묵주기도를 몇백 단씩 바치는 것은 불
저는 고등학생 때 사회과목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중에서 ‘법과 사회’와 ‘정치’라는 과목에 많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혹시나 이 글을 보는 고등학생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두 과목이 통합되어서 '법과 정치'라는 과목으로 개정되었습니다.) 사람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과 사회’ 1단원의 첫 장에 나오는 법의 의의와 구조라는 테마 가운데에서 법과 도덕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착한
지난 주일 본당에 13명 아이들의 첫영성체가 있었습니다. 5월 중순에 부모님들과의 첫 모임을 시작으로 1주일에 4번씩 교리수업과 미사참석, 가족 성경필사 등 인고의 노력을 통해 모든 어린이들이 첫영성체를 받았습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첫영성체에 빼놓을 수 없는 교리시험과 기도문 외우기 등의 찰고도 있었습니다.사실 첫영성체를 시작하면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많은 부분에서 걱정을 합니다. 그중에 아이들의 걱정은 사실 직접적입니다. ‘기도문을 외울 수 있을까?’ 정도의 고민이지요. 부모님들의 고민도 존재합니다. 많은 분이 공감하시겠지만 주로
지난주 성령 강림 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를 마무리하고 교회는 다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연중시기의 두 번째 시기를 지내며 각 주일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는 두 가지 축일을 지냅니다. 그중 첫 번째가 이번 주일에 기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미사를 시작할 때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미사를 시작할 때 사제는 처음에 인사로써 주님의 현존을 선포합니다. 몇 가지 양식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짧게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든가 주교님의 경우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는 양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일 1독서는 사도행전의 첫 부분을 들려줍니다. 사실 1독서에 등장하는 사도행전 1장은 사도행전의 시작으로도 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루카 복음의 끝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같은 사람이 썼다고 전통적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초기교회의 많은 흔적은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을 한 권의 책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성경의 순서 즉 목차가 정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사이에 요한 복음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우리는 루카 복음을 루카(라고 불리워지는 이
이번 주일 2독서로 제시된 요한 묵시록 21장은 묵시록의 마지막을 향해 인도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갑니다. 묵시록의 저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존재와 동시에 언급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의 ‘사라짐’입니다.(묵시 21,1) 사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 그것도 이사야서 3부에 유일하게 등장하고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2서와 요한 묵시록에만 등장하는 드문 표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에게
사제가 되고 첫 휴가때 가족들과 함께 제가 유아세례를 받았던 대구의 한 본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왔기 때문에 많은 기억은 없습니다. 더욱이 유아세례를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르막길에서 보이는 팔 벌린 예수님의 모습과 부모님과 함께 있었을 성전 안의 유아실, 큰 나무 밑에 있는 벤치와 둥근 의자들이 제 어릴적 기억의 일부와 어렴풋이 일치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하느님
파스카 성삼일, 그중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에 등장하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등장하는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첫 장소에서부터 수난 예식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키드론’ 이라는 말은 ‘혼탁한’, ‘어두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둡고 혼탁한 계곡을 지나, 당신 수난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 키드론 골짜기는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시
소수의 권력이 폐쇄된 하나의 집단사회를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분노와 불만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공의 적이라는 장치는 구성원끼리의 자기검열에도 효과적입니다. 공공의 적으로 낙인된 사람을 함께 공격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 한 편이라는 오해를 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장치에는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이 시스템에 순명하지 않으면 나도 언젠가는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