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 요한바오로 2세는 대희년이던 2000년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알려진 파우스티나 수녀(1905-38)를 시성하고, 이어서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자비의 예수상’과 신심기도가 전 세계 가톨릭인에게로 퍼져 나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가톨릭 신심에서 비켜나 동양 전통의 ‘자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동양에서 자비의 ‘자'(慈)는 상대편의 기쁨(樂)을 헤아리고, ‘비'(悲)는 상대의 고통, 슬픔, 처지에 함께 동참하겠다는 ‘연민’을 의미한다. 그러니
사순시기는 붕괴의 시기다. 사순시기는 인류가 ‘실재’라 믿고 있는 이 세계의 토대가 ‘환상’에 기반해 있음을 알게 하는 시기다. 사순시기는 실로 잔혹한 시기다. 그동안 믿고 싶었던 안락한 둥지와 작은 성공들, ‘혹시’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무수한 선전들이 실제로는 착시로 가려진 거짓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시기가 혹독한 이유는 약간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데 있다. 토대가 환상인데 남겨 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남겨 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내가 깔고 앉은
남편이 죽자 그녀는 하나 남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죽은 남편도 내연 관계의 여자가 있었으니, 신애는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조차 붙들 수 없는 외로운 여자다. 그녀를 살게 하는 실낱 같은 희망은 오직 어린 아들뿐이다. 그렇게 겨우 고향에서 적응해 나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유괴를 당한 아들이 어느 강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아들이 다니던 학원원장이었다. 그녀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던 중 신애는 약국 아주머니를 통해 교회를 다니게 되고
아브라함이 처음 주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두고두고 의미심장하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 12,1-4) 그리고 그는 그 긴 여정의 끝에 나타난 주님으로부터 오늘 첫 독서의 말씀을 다시 듣게 된다. 아브람이 도달했던 ‘가나안 땅’은 이집트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엄청난 땅으로 확대되었다. 늙은 아브람에게 이런 크기는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대지였을 것이다. 그 땅이 그의 후손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니 실로 과
제 눈에 들보 감추자고 비겁하게 남의 눈에 티만 보면서 죽자고 매달리는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티’를 확대하고, 사람 소외시키고, 매장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사람들, 너무 많다. 가끔씩 그 포착능력에 감탄도 한다. ‘티’는 ‘티’니까 일부 맞는 것도 있다. 그러나 티 없는 사람 어디 있다고 족집게로 잡아내고, 먼지까지 터는가. 문제는 이들이 제 심각성에 대해선 무지할 뿐만 아니라, 알려 줘도 오토매틱이라 손쓸 길이 없다는 데 있다.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을 진행하면서 발견한 업적 중 하나엔 “방어 기제”라는 것이 있다. 지금은 너무도 대
예수의 ‘행복선언’은 실패한 선언인가? 그는 인간이 겪는 가장 불행한 지점을 들고 와서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선언한다. 누가 예수를 선듯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장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는 지구상에 이런 예수를 믿는다고 따라나선 ‘그리스도교도’들이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고, 섬길 수 있었을까? 그들은 복음서 앞에 나오는 이 행복선언을 어떻게 알아들은 걸까? 사실 ‘예수’를 이해하기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진실은 ‘그리스도교도’들이다. 잠시 역사를 훑어봐도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지구상에 끼
어느 신학자가 했다는 말이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믿는 그런 하느님은 존재치 않습니다.” 열심히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상당히 불쾌하고 당혹스러울 것 같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하느님이 아닌 ‘무언가’를 섬긴다면 그것은 우상을 말함인가? 우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나자렛을 찾은 예수도 저 신학자가 한 말처럼 회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과부와 나병환자가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1월도 어느새 중반이 지났다. 새해에 세운 계획은 모두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예수의 세례 축일’로서 화려했던 성탄시기는 막을 내리고 이제 ‘연중시기’로 들어섰다. 예수의 첫 공적 행보를 알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래서 더 절묘하고 멋지다. 그가 세운 계획의 첫 출발지가 ‘혼인 잔치’라는 사실이, 궁극적으로 그가 품고 있는 속내, 그가 사랑하는 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아서다. 혼인은 두 사람의 결합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혼인 잔치는 가족과 마을, 사회의 경사로 이어지는 공동체의 축제다.(물론 여기서 혼
주님의 공현(Epifania) 대축일이다. 구유에 삼왕을 모실 즈음이면 이제 축제가 끝나감을 예감하게 된다. 나에게 공현 축일은 이렇게 징검다리 같은 축일이었다. 물론 수녀원 안에서는 1년에 한 번 성대한 삼왕공연식이 벌어진다. 절대 ‘징검다리’일 수 없는 축하연과 삼왕극이 벌어지고, 1년에 한 번 세 왕들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선물로 받는 기쁨도 누린다. 삼왕은 딱 한 번 수도회 안에서 최고 권력자가 되어 꽉 막힌 수도회 규율 하나를 깨고 은전을 베푼다. 최고 장상도 이때는 삼왕이 베푸는 은전에 순명해야 한다. 수도회 안에 있
성탄이 바짝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경기가 바닥을 친다고 엄포를 놓아도 상점마다 약간의 성탄 분위기는 띠우며 산다. 중심가를 걸으면 경기 따윈 다 잊게 된다. 60-70년대 오랜 축음기에서나 듣던 해묵은 캐롤이 어김없이 틀어지는 걸 보면 반백의 구부정한 노인들도 이런 날은 어깨를 좀 펴고 젊은이가 되어봄 직하다. 그런 향수는 손때 묻은 레코드판처럼 틀어도 틀어도 기분 좋은 법이다. 성탄은 그런 마법을 지녔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를 ‘동화’ 같은 세계로 끌고 가기 때문이다. 아, 비록 그것이 아주 찰나적인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등장하는 바룩서, 세례자 요한, 이사야서는 모두 예언적 전통에 근거한다. 물론 다 알다시피 예언자들의 정신은 탈출기에 근원을 둔다. 탈출기에서 광야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이끄는 ‘신 체험’이 이루어진 곳이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현장이다. 이후 탈출기는 유배지를 떠돌던 이스라엘에게 줄곧 “회개”의 방향을 가리키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니 이들이 요청하는 회심의 방향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광야”는 늘 가장 신실하게 하느님을 대면하고 만나는 장소의 상징이었던 것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제정되었다. 이후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거쳐 전례력 마지막 주일에 안착되기까지 선대 교황들이 각별히 공을 들인 축일로 기억된다. 긴 축일 명명은 독서(다니엘서와 묵시록)와 복음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마치 묵시록의 한 테마를 장엄하게 선포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가 전 세계의 ‘왕’이심을 선포하던 자리는 최소한 축포가 터지고 세계의 사신들이 도열하며, 축제가 벌어졌어야 마땅할
오늘 성경의 과부 이야기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하느님께 바친 두 과부의 영웅담과 그들이 받은 대가를 칭송하기 위해 꺼내 든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얘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이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신도를 갈취하기 위해 쓰는 전형적 수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런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끔찍이 혐오했다.(마르 12,38-40) 오히려 성경은 전혀 다른 곳을 가리킨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 각자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와 사회가 어디서부터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엘리야가 믿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극적 테마를 지닌 한 편의 드라마다. 이 무대의 주인공은 단연코 ‘예수와 바르티매오’. 복음서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하층민 눈먼 거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왜일까? 대부분 역사의 서사가 그렇듯이 세계는 ‘위대한 자들’만을 기억하고 기록에 남긴다. 한 세대에 70억이 살아가도 역사에 기록되는 인물은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리는 걸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런 역사의 법칙에 반하여, 역사가 잊어버리고 지나친 그 잉여의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지구상에 등장할 때부터 지혜와 탐욕은 함께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에 첫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선하기도 했고, 탐욕스럽기도 했던 것이다. 성경은 첫 사람들을 통해 이 사실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왜’, ‘어떤 방식’으로 하느님의 거처(에덴)에서 추방되었을까? 뱀은 금지된,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로 첫 사람들을 데려갔고, 거기서 ‘금단의 열매’를 다시 바라보도록 유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창세
9월 어느 날 새벽에 느꼈던 ‘서늘한 바람 한 줄기’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40일이 넘게 40도를 오르내린 폭염에 완전히 지쳐 있을 때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서늘함’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오아시스가 ‘물’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던 순간이었다. 111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고도 했다. 기후변화가 일으킬 재앙의 정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새삼 절감한 여름이다. 처음으로 ‘온 국민 냉방복지 권리’라는 말도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지구를 강타하는 폭염은 물론 초강력 태풍과 홍수, 빙하가 사라지고 있다는 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현재 진행형 질문이다. 오늘 봉독되는 두 개의 독서와 복음은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진면목이 어떤가를 소개한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당할 수난을, 야고보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를, 마르코는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가야 할 길을 예고한다. 이 중 어디에도 ‘메시아’의 멋진 후광은 찾아볼 수 없다. 군중들로부터 받았던 장밋빛 칭송과 영광은 잿빛처럼 차갑게 돌아올 것이다. 그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뺨을 내맡기고,
강이나 바닷가에 아이가 있으면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감시를 해야 하고 위험지대를 알리는 노란 띠를 둘러야 하며, 필요한 규칙을 지키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토를 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수영하는 법을 익히고 위험을 다루는 여러 훈련을 받게 된다면, 그리고 청년이 되어 먼바다로 나아갈 만큼 성장했다면 어린 시절에 적용했던 규정과 세세한 수칙은 버려야 한다. 아이적 필요했던 규정을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 적용한다면, 그래서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가두는 도구가 된다면 더
익숙한 세계 속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은 끊임없이 충돌과 불화를 낳았다. 예수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또 돌아왔다. 예수는 낡은 것, 폐기해야 할 것과 새로운 것,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것 사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고 중심이었다. 오늘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벌이는 ‘말다툼'(요한 6,52) 역시 그러하다. 유대인들에게서 문제는 ‘살과 피’가 지닌 진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들이 고수한 신념체계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 사실이 더 크고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