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부르심을 따라 자리를 이동한 지 5개월이 지나갑니다.앞선 글들을 통해 여러 번 제가 집에서만 지내고 있음을 알렸기에 재차 언급하기 민망하지만, 제가 있는 지역은 최근 다시 급증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로 인해 잠시 활력을 찾았던 거리는 2주 만에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조용해졌습니다. 다음 차례는 성당 개방이었는데 말이죠. 언제쯤 성체를 직접 모실 수 있게 될까요.저는 이곳에서 수녀님 네 분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제외하고는 바깥 외출 없이, 매일 우리끼리 얼굴을 맞대고 지내고 있습니다.‘이렇게 지내는 공동체 삶이
기사를 통해 많이 보셨듯이 세계 곳곳에서 ‘B.L.M’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한창입니다. 물론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는 혼란스러움을 틈 타 약탈과 폭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 긴장스러운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인종 차별에 대해 더 많은 사람이 목소리를 내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얼마 전, 공동체 수녀님의 권유로 함께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처음 뉴스에서 접한 시위 장면은 사건의 특수 상황과 맞물려 분노에 차서 몰려든 수많은 흑인에게 무장한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래
제가 있는 곳은 6월까지 이동 제한령이 한 번 더 연장된 덕에 지난 3월 초부터 석 달째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글자로 쓰고 보니 그동안 많은 날짜가 지나갔음이 새삼 느껴져 가슴이 답답합니다. 매일 같은 사람과 공간, 산책하러 나가서 만나는 풍경조차 늘 반복되니 가끔은 멍해질 때도 있습니다.“이럴 때 피정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세요. 수도자는 기도해야지!! 아니면 좋은 책이 얼마나 많아? 책을 좀 읽던가. 아니 이런 시기에 내면을 잘 갈고 닦으면 좋은 수도자가....” 신부님께서 진심으로 오랜 시간 말씀해주신 해결법은 영 맘에 들
“이모도 이렇게 조그마한 애기일 때가 있었어? 난 이모가 원래 이렇게 크게 태어났을 것만 같았는데....”“저기요. 너도 늙거든요??”옛날 사진첩을 함께 보다 조카가 툭 던진 한마디에 집안이 시끌벅적합니다. 그러게요. 저도 참 조그마한 애기였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커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던 시절에는 좀 더 간절하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어른이 되어서는 예상과 다른 현실에 당황하는 중입니다. 어른이 되면, 확고한 중심으로 인해 헤매지 않을 수 있는 이
제가 있는 곳은 지난 16일부터 이동제한령이 내려져 집에서만 지내고 있습니다. 같이 사는 수녀님들은 출근하지 못 하시고 줌(ZOOM)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강의, 영적 동반, 학교 회의 등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미사 또한 이뤄지지 못해서 인터넷 미사를 보고 있지요. 뉴스를 보니 제가 있는 이 작은 곳의 일만은 아닌 것 같네요. "세상이 아프대요. 그래서 친구들을 만날 수 없대요." 학교에 못 나가 답답해 하는 옆집 꼬마의 이야기를 들으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팬데믹을 선언하는 뉴스를 볼 때 까지만 해도 그래도 끝은 있지
이 시간쯤이면 꽉 차 있을 버스 안이 한산합니다. 덕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보니 거리에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나마 눈에 띄는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마치 어릴 적 봤던 무서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코로나19라는 이름을 가진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사회가 멈춰버린 것 같습니다.새해를 맞고 여러 변화의 때를 맞아 희망과 새로운 마음가짐을 이야기할 틈을 놓치고 매일 늘어나는 확진자 숫자를 확인하며 나도 모를 불안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공기청정기가 필수인 시대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았는
이 세상의 구원자가 포대에 싸인 아기로 탄생하시기 전, 하늘의 알림을 받고 움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이면 꾸미고 찾아가는 구유에 모인 분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마구간에 구세주가 나신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갑자기 찾아온 천사가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받아들여 구세주를 잉태하신 성모님, 단지 꿈에서 들은 천사의 고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받아들인 요셉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그룹의 인물들. 오랜 세월 기다리던 구세주의 별이 나타나자 바로 길을 떠나 먼
주님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을까?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실까?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다가 자주 들었던 질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생전에 곁에서 따르고 사랑하던 사도들 막달라 마리아도, 다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알아 봤는데, 난 무슨 수로 알아 볼 수 있을까? 걱정도 됐습니다.악을 따라 살다 악만 남은 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왕이라며! 당신 자신도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구만! 이 고통을 왜 못 없애냐고!” 절망의 도가니에 모여든 이들은 말마디만 조금씩 다를 뿐 이렇게 외치며 어둠의 구덩이를
최근 모교 도서관에 갔다가 대자보 벽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 벽은 작년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평양 시민들에게 한 연설문과 김정은 위원장의 답사가 전문으로 나란히 붙던 자리이고, 학생들이 함께 고민할 이슈와 주장을 선별하여 게시하는, 나름 학생의 시선으로서의 대표성을 띄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벽을 거의 유일하게 채우고 있던 것은 학교에 소속되어 있던 긴 시간 동안 학내에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던 낯선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소위 ‘조국 사태’를 학생으로서 바라보는 입장인 듯 시작된 첫 줄부터 거짓 정보와 비논리
예수님의 외할머니. 언뜻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분입니다. 성녀 안나, 성모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외가 삼대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독특한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에 유화로 그린 ‘그림1’, 다른 하나는 종이에 목탄과 백회로 그린 ‘그림2’입니다. 첫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은 재료 면에서만이 아니라 등장 인물과 몇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그림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본 것은 도판이 아니라 실물이었습니다. 런던 내셔
영국의 서쪽 해안 지방에서 바다를 보면서야 이해된 회화들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터너를 비롯한 많은 영국 화가의 작품에 등장한 그 하늘과 바다는 상상도 과장도 아닌 정말 그들이 눈으로 본 장면들이었고, 변화무쌍한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그것을 그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안에서 신의 존재를 찾고 삶에 대한 질문을 담아낼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하느님”이 탄식처럼 나왔습니다. 이 그림은 지난 연재 글(2019. 6. 26일자)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영국의 천재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최근 한국 뉴스에서 한국 대통령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은 옆 나라 총리의 얼굴. 그리고 다른 나라의 내각 구성을 위한 참의원 선거의 결과가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상황이란. 이것 자체가 자주 독립 국가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인가 반사적으로 불쾌해지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며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파는 이가 힘 과시를 위해 들고 나온 국가 규모 ‘안 판다’의 억지 주장에 맞서 개개인의 자리에서 조용히 시작된 ‘안 사요’ 운동. 거짓과 폄하를 바탕으로 감정적 ‘혐오’의 반응을 부추기는 ‘혐한’ 도발에 법과 정의의 집행을 촉구하며 차분히 맞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간에 힘을 주고 입을 앙 다문 얼굴을 보면 매우 집중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긴장도 한 듯 보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엄마가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혀서 데려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옆에 놓인 성경과 그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은 성당의 미사 중 강론 시간입니다. 영국의 천재 작가 존 에버렛 밀레이는 당대 화제가 되는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자신의 5살 딸을 모델로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2년 후 그려진 다음 그림으
“야…. 근데 듣다 보니 좀 이상하다. 넌 거기 왜 갔는데?”“네?”“가고 싶어서 갔을 거 아니야. 누가 등 떠민 게 아니고.”“그죠.”“근데 가서 뭐 하는 건데? 하고 싶은 거 안 하고?”“아, 몰라요.… 음.… 활동시간 채우는 거? 그것 때문에 하는 것 같은데?”“그거 왜 채우는데?”“뭐…. 생기부(생활 기록부)에 쓸 수 있으니깐? 나중에 입시에.”(옆에서 듣던 친구가) “오, 현실적인데?” 고등학생들과 수업 중 한 친구가 최근 자신이 미술 동아리에서 하고 있는 조별 과제 이야기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면서 거듭 다짐하고 기도했더랬습니다. 예식이 아니라 의미로서 이 성삼일을, 성주간을 보내게 해 주십사고. 그러나 성목요일, 성금요일, 파스카 성야 미사까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아, 큰 실수 없이 전례가 끝났다, 내일은 언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빼먹은 것 없나?’ 하며 긴장을 놓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함께 준비한 수녀님들께 고맙게도, 전례에 참례한 분들은 성삼일의 은총 속에 잘 머무실 수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저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기쁨과 축하의 자리가 아닌 길 어딘가를 여전히
움직이는 그림이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것도 아닌 색 면들이 가득 찬 그림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공기층처럼 일어나 나를 감싸기도 하고 퍼지기도 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림 가까이 다가가고 있나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봐도 내 발은 그 자리에, 그림은 벽에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색을 머금은 공기가 다시 일어납니다. 그리고 심지어, 음악이 들리기 시작합니다.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70)의 그림 앞에 서 본 날, “회화란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
비틀즈의 노래 중 ‘All You Need Is Love'(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는 영화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합니다. 1967년 영국 방송이 최초의 전 세계 위성 TV 프로그램인 ‘아워 월드’를 기획하면서 비틀즈에게 출연을 부탁하자 존 레논이 내놓은 곡이라고 합니다. 베트남전의 비극 이후 반전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모두에게 쉽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이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임을 선언하는 것이 가장 혁명적이라고 여긴 것 같습니다. 일부를 의역해 보았습니다. 만들어질 수 없는 건 만들 수
얼마 전 근처 본당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녀원에 위탁 피정을 왔습니다. 창세기의 시작 장면을 함께 이야기하다가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부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을 각자가 떠올려 보았습니다. 중학생 한 명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자는데 그 누구냐, 아담한테서 갈비뼈 하나를 꺼내 가지고요, 예수님을 만들었어요.” 다들 박장대소가 터졌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한 번에 시작되는 새로운 신학에 한참 웃기는 했지만 이 학생의 이야기가 왠지 마음에 남았습니다. 기도하며 보니 질문들이 올라왔습니다. 왜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인가. 함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야 9,5a)수녀원의 성탄 대축일 밤미사에는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십니다. 저희 가족들도 오랜만에 수녀원 미사에 참례하러 오겠다 했습니다. 특히 올해 태어나 6개월 된 막내 조카에게는 첫 수녀원 나들이었습니다. 미사 반주를 하느라 성당 2층에 있는데 미사 중간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우리 큰 조카가 왔구나. 신부님이 강론을 시작하시자 아기의 힘찬 목소리가 추임새처럼 중간중간 들렸습니다. 아, 작은 조카가 왔구나. 미사를 마치고 내려가자 큰 조카는
‘아니, 아니, 이 그림 말고....’한 달에 한 번 이 글을 쓸 때가 되면, 요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더 멈춰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림이 먼저 나타날 때도 있지만 보통 간발의 차이로 내용에 이어서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하려는 이야기가 있으나 뭔가 막힌 듯 그림이 떠오르지 않아 기억 속 저장소를 뒤지다가 이 작품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이거 말고!’, 치웠는데 또 떠올랐습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