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르드-박춘식 1858년 2월, 프랑스 남서부 한 산골 시냇가 바위벽 홀연 나타난 천향(天香) 귀부인, 철부지 14살 소녀는 기겁하여 무릎 꿇었다 기도 많이 하라는 귀부인 소문은 시골길 가득 흘러 넘쳐 수많은 묵주 행열이 이어졌다 당황한 그곳 시골 성당 신부는 소녀에게 윽박지르듯 도대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하여라, 명령하듯 하늘 귀부인 &hellip
광야를 꿈꾸며-홍윤숙 사람이 광야로 갈 수 없을 때 광야가 사람에게 오기도 한다네 평 반짜리 나의 방은 때로 나의 광야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세상에 매여 있는 모든 끈 풀어버리고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량한 영혼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시공을 넘어 마음의 성소 한 채 지어보려 하지만 어쩔까 전화 벨소리 초인종 소리에도 무너지고 마는 약한 모래성 도시의 광야는 이
미사 일기 1- 이대근 오늘은 미사경본의 글자 하나 하나가 망초대꽃처럼 눈을 뜨고 빠안히 나를 쳐다봅니다 경본 속에 인쇄된 예수의 말씀이 알을 깨고 책갈피 속에서 참새떼가 되어 푸드득 푸드득 날아다닙니다 어디에고 숨을 곳이 없습니다 미사라는 빨래터에서 내가 깨끗이 빨아집니다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지 않게하소서,이대근,사람과사람,75쪽 시인은
창세기 55장 9절- 박춘식 1 아으 그 옛날 하늘님이 시로써 세상을 만드셨다 2 시의 첫 구절은 경이로운 빛줄기였고 3 보기 좋고 듣기 즐겁게 여섯 구절까지 읊은 다음 4 일곱째에는 쉼표를 찍었다 5 흙덩이로 첫 사람을 빚을 때에 6 사람도 시를 지을 수 있도록 7 시혼(詩魂)을 감싸는 오관 안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어 8 시는 사랑임을 깨닫기 원하였다
고독 문답- 김남조 오늘은 고독의 일로 아뢰나이다 저희는 고독의 양 떼 고독에 있어서도 주께서 목자시나이까 나직이 이르시되 바로 그러하다 그리고 너희가 고독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겠으며 내가 고독을 모른다면 어찌 신이겠느냐 너희와 나는 서로 닮았으며 언제나 함께 있다 오오 하느님 고독의 위안 바람 불고 양털 두른 듯 따스하나이다 기도:김
11월-박춘식 숨가쁘게 달려왔다 1 2 3 4 … 가끔은 지겨운 흙길 달력 한 장 한 장 밟으면서 어느새 나뭇잎에 가렸던 무덤들이 가까이 보인다 텅 빈 들판에는 검불 태우는 연기가 계절의 향연으로 피어오른다 11 — 두 글자가 저승 들어가는 문 문설주로 우뚝 내 앞에 서 있다 어머니하느님, 박춘식, 미루나무, 22
나무예수 -문인수 찬비 부슬거리는 가을입니다 언덕 위엔 다만 단풍나무 홀로 뜨겁습니다. 젖어 더욱 붉게 불 붙습니다. 먼 잿빛 반경내의 온갖 물상들이 이 도시 변두리 낡은 집들의 창이며 추운, 어두운 마음들이 언덕을 향해 한참 주목합니다. 언덕을 향해 꾸역꾸역 몰려 올라갑니다. 제 깊은 슬픔 널어 말립니다. 동강의 높은 새, 문인수, 세
눈동자들- 박춘식내 밥상에는 언제나 작은 눈동자들이 가득하다 밥상 모서리에 올망졸망 붙어 있다숟가락 들 때마다 내 손을 말끄러미 쳐다본다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밥 먹는 나를 빤히 보는 눈동자도 많다 맛있는 반찬을 넘길 때 그 많은 눈망울들이 내 손목을 꼬옥 잡아 끌어 당긴다 어떤 눈동자는 사그라지고 있다 내 입을 보고 있던 눈까풀이 겨우겨우 올라갔다가
차 한 잔 -이정우 하느님, 차나 한 잔 합시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잠도 더 오지 않고, 글쓰기도 안되고. 저 혼자 차를 끓여 마시려니 자꾸만 심심해집니다. 하느님, 여기 제 방에 오셔서 차나 한 잔 같이 합시다. 앉은뱅이 꽃의 노래, 이정우, 문학수첩, 88쪽 밤중에 깨어나면 컵라면을 후루룩 쩝쩝하는 사람도 있고, 아내의 지친 등골을
기도 / 박춘식 어떤 이는 하느님을 석고 틀 안에 넣어 정교한 규격품으로 만듭니다 흐르는 물을 밟으며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감사노래 하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미루나무 바라보며 하느님은 나뭇잎을 어루만지는 바람이었구나, 라고 들숨 날숨으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시의 첫번째 연은 하느님을 고체로 여기
가을의 기도 2-윤임규 내 몸과 마음을 거두어 가십시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나뭇잎 다 떨어져 쇠잔한 팔 위에 거미줄처럼 걸리는 바람과 별빛도주여, 이젠 거두어 주십시오 그냥 아무것 걸친 것 없는 몸이게 그냥 아무것 들리지 않는 마음이게내게 있는 모든 걸 거두어 주십시오 이제는 당신의 온유한 마음 속에 내 피곤한 눈을 감겠습니다 황량한 비바람의 언덕에서
9월이 오면 -박춘식 수많은 밀 알갱이들 껍질이 빠개지면서 가루로 변한다 한 덩어리로 반죽된 다음 불기운으로 하얗게 올라 선 제단, 거기서 하늘의 몸과 피를 받는다 하늘 빵 안에서 하늘 기운을 받은 이들이 몸통이 찢기고 잘리고 쪼개지며 … 다시 그 사랑에 다시 그 자리에 새로운 밀 알갱이들이 가득 쌓인다 선혈처럼 새붉은 구월이 오면 많은 밀알들
오늘-구상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별 1 / 정지용 누어서 보는 별 하나는 진정 멀-고나. 아스름 다치랴는 눈초리와 금(金)실로 잇은듯 가깝기도 하고, 잠 살포시 깨인 한밤엔 창유리에 붙어서 였보노나. 불현 듯, 소사나 듯, 불리울 듯, 맞어드릴 듯, 문득, 령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 처럼 일는 회한(悔恨)에 피여오른다. 힌 자리옷 채로 일어나 가슴 우에 손을 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