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구월-박춘식 한강은 어찌나 파랗던지 하늘이 강물에 꼼짝없이 잡혀 있었다 서쪽 바다 풍랑을 넘어온 목선(木船), 그날 빈 돛대 위 새들은 날개를 펴지 못했다 그 해 구월 한강의 고기들이 꾹꾹 입을 다물었다 번뜩, 긴 칼날 아래 뜨거운 피가 모래를 삼키고 강물이 선혈(鮮血) 밑에서 몸부림쳤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안드레아 김대건 첫 사제의 머
현대판 바벨탑 -박춘식 온 세상이 하나님 하늘님 하느님 낱말을 쓰고 있는데 어느 날 그들은 서로서로 말한다 벽돌을 벌겋게 구워 하느님 이름으로 탑을 높이 쌓아 깃발을 세우자 돈을 모아 하느님 위엄도 세우고, 밥상도 걸쭉하게 차리자 탑 위의 얼굴들은 명령하느라 늘 근엄하다 큰 벽돌 율법을 만들어 탑 아래 사람들을 다그친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곧 하느님 말씀
꿈 38 -박춘식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 정문 대기실로 올라간다 아침에 죽은 이들이 알몸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다음 종이 한 장 들고 모두 천사의 얼굴을 쳐다본다 이름, 나이, 남자 여자, 어느 나라 네 가지만 적어라 한다 교수 장관 재벌 성직자 판검사 장군 법관 언론인 등등등 쟁쟁한 그들은 종이에 직업란이 없다며 내내 투덜투덜한다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믿음에게 묻는다-박춘식 광속(光速)으로 다닐 거야 어디든 영원히 전능의 힘을 억세게 잡고 노래 불러야지 물론 하늘도 천 개의 손으로 나를 잡아 주리라 믿고 믿어 이봐, 신(神)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도대체 토악질 세상 냄새 역겹게 왜 항상 시끄러운 거지 하느님 그분이, 아이가 굶어 죽어도 팔장끼고 구경만 하다니 말도 안 돼 실망 대실망 하늘이 세상
성모승천-김남조 어머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길은 어디오니까 하늘 광명한 데서 거듭 저희에게 오시는 그 길은 더욱 어디오니까 작은 소망과 먼 기다림이 이른 봄 실바람으로 커 가는 곳에 오묘히 그 위로를 숨기시는 달고 어진 침묵 안에 밤에도 오시며 임종의 머리맡에 일일이 특별한 애련으로 지켜보시는 어머님 어머님, 하늘의 빛보래를 갈라 은하 후광으로 두르시고 한없
시인(詩人)은 - 박춘식 보물찾기 놀이를 성업(聖業)으로 받드는 사람이다 손 바닥에 가득한 햇볕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뽕나무 뿌리가 지렁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아이스크림을 보고 아이들이 폴짝폴짝 뛸 때 그 진동이 지하 70미터까지 갈까 적어도 10미터는 가겠지 지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하품을 하는지 아가미를 지나간 물은 옆에 물보다 얼마나 더 비릴까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정호승 신부님 저는 배가 부르면서도 아사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방금 벌컥벌컥 생수 한 병을 다 들이켜놓고도 타는 갈증의 감방에 쓰러져 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두 발을 준 까닭은 서로 함께 걸어가라고 준 것이나 저는 그 누구하고도 함께 걸어가지 못하고 홀로 걷다가 홀로 떠나갑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사람 대신 스스로 아사감방으로 걸어들어
십자가 4 -박춘식 종소리가 사방 달리다가 종탑으로 몰려와 십자가 되고 나무가 누워 기도하더니 반듯한 십자가로 일어선다 쇠십자가 돌십자가 나무십자가 금십자가 콘크리트십자가 천 년 넘어 또 넘어 높이 바라보던 딱딱한 아픔들 주님의 소리가 물 위에 머물고 주님께서 크나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시편29-3) 잡을 수는 있지만 세울 수 없는 물 십자가는 늘 아래
시(詩) / 박춘식 하느님이 세상을 지으시면서 모든 존재 깊숙이 비밀을 감춰 두었다 미루나무 우듬지에 비둘기 부리 안에 알갱이 모래 속에 각각 비밀 여러 개 숨어있고 그 모습도 천태만변이다 시(詩)는 '것'이 아니고 '일'이다 천 편 '일' 안에 '얼' 하나 피어난다면 그 '얼'이 수직으로 솟는 무지개가 되리라 시(詩)는 감추어진 속비밀을
남겨진 꽃- 김혜숙 전자 오르간을 닫고 꽃을 든다 난이랑 백합이랑 장미랑 제대에서 밀려난 꽃향 사이로 숨어 있던 휘파람이 새어 나온다 나풀거리는 나비 닮은 꽃이 나를 바라본다 — 아직 고우니 쓸쓸은 남겨 두어라 — 아이야 내가 널 보고 네가 날 보고 오늘은 참 고운 마음 데리고 가는군 받들던 꽃 모시고 가는군 시드는 꽃잎으로 밝히는 그
성인 김대건 / 박춘식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 하나 없는 하늘을 생각하는 꽃 한송이 없는 스산한 사막에 하느님이 나무 한 그루 몰래 심는다 첫 나무 매일 물 먹이고 애써 가꾸었더니 하늘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목을 따 죽인다 하느님 눈물이 긴 새벽을 적시면서 죽은 나무에 새순이 돋아 옆 가지가 생기고 갈 봄 뛰어 넘으면서 뿌리가 길게 뻗혀 새로운 나무들이 솟는다
성체(聖體), 사랑빵-박춘식 억 년 억 년 전에 하느님은 눈부신 빛살로 만 년 만 년 전에 하느님은 넓고 깊은 소리로 천 년 천 년 전에 하느님은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백 년 백 년 전에 하느님은 새 길을 만들면서 거룩으로 희망으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무시로 오시는 분, 이제 이 곳에 하늘떡 복떡 생명떡으로 눈물빵 웃음빵 하얀빵 사랑빵으로 우리 마음
사랑의 확대-이정우 내 사랑은 차츰 확대되어 이제는 무한정(無限定)이 되었다.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나의 사랑이 되고 사물 또한 한결같이 그렇게 되었다. 나는 이제 사랑하지 않고는 누굴 보거나 무얼 대하지 않는다. — 예수께서 “사랑은 모든 법의 원리요 총화(總和)이니라” 고 하셨다 — 앉은뱅
마음, 유월의 성심-박춘식 너를 생각하다가 심장이 터졌다 무쇠에 찔리기 전에 이미 내 심장은 무참히 갈라지고 있었다 하늘 아버지에게 울며 매달린다 핏줄기가 온 땅을 기어다니다가 천둥 번개에 솟구쳐 아픔을 부르짖는다 바위 틈으로 검붉게 스며들고 나무 안으로 시뻘겋게 올라간다 그러다가 터진 내 심장은 어제도 오늘도 너의 심장을 찾아 다닌다 끝없는 과다 출혈을
그림자도 남기지 말라 -박춘식 하늘이 바다를 바짝 끌어당겨 매일 푸르른 탐라에는 쇠붙이 그림자도 남기지 말라. 하루에도 천 번 만 번 고래가 증오하는 함포는 오지 말라고 파도가 외친다, 여기는 오로지 바다 사랑 숨결만 남아 있으리라. 포격을 준비하는 쇠붙이 화약 냄새 그 찌꺼기도 남기지 말라, 이곳에는 들꽃 뫼꽃을 부르는 유채꽃 향기만 남아라. 직선으로 번
나무가 겸손한 까닭 4 _박춘식 황량한 들판을 지키는 한 그루 아름드리 빛 나무 구름 번개 우박 천둥 함박눈 바람 노을 소낙비 무지개 별똥별 새소리 보이는 대로 죄다 끌어당겨 잘게 썰고 썰어서 마른 땅위에 흠뻑 뿌린다 거름 주듯이 어떤 것은 뿌리 속 깊이 집어넣어준다 어느 맑은 날 그 나무, 하느님 손을 잡더니 품에 꼬옥 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함께 살자며
에페소의 성모님 집_홍윤숙 길 위에서 걸으며 차 안에서 흔들리며 어머니 부릅니다 그렇게 아드님 잃으시고 요한에게 이끌려 멀고 먼 터키 땅 에페소에서 보내신 여생의 나날 그 슬픈 날들이 점철된 에페소의 작은 성모님 집에서 흔들리는 촛불 한 자루 눈물로 바치고 왔습니다. 삼 년 전 성모님 제 어미도 불쌍한 한국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나마 편히 쉬게 하소서, 성모
오월의 어머니-박춘식 옹가슴에 박힌 크막한 못을 뽑지 못하고 허접한 군생(群生)을 멸시하는 톱날은 목에 걸려있고 흙 속 깊이, 아직도 파묻지 못한 오만방자 역방향 집착과 불만을 멀리 내던지지 못하고 매운 양념으로 익은 걱정들은 소화 되지 않고 하늘이 차가운 암흑물질로 보일 때 땅에서 흙냄새가 나지 않을 때 흐르는 시간을 껴안고 쳇바퀴 도는 수차(水車)같은
성모상 앞에서 -유안진 눈발이 굵은 오후에는 그리워지는 성모님 구하는 것 없이 찾아왔습니다 제 인생의 오후는 오늘처럼 내내 소원이 없게 하소서 아무런 까닭 없이 당신이 보고 싶어지는 그 이유만으로 문득문득 찾아와 우러르게 하소서. 나그네 달빛, 유안진시집, 신원문화사마음이 일렁거릴 때 그리고 일상을 벗어나 어디 가서 좀 편하게 앉고 싶을
오월의 청향(淸香)- 박춘식 마리아는 하느님의 숨결 마리아는 우주의 가슴 마리아는 사계절의 빛살 엿새 동안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이 그 다음 날 쉬시면서 뭔가 부족한듯 골똘히 생각하다가 여드렛날 아리따운 한 낭자를 빚었습니다 만약 만약 이 세상이 더러워질 경우 세상을 새롭게 예쁘게 꾸밀 수 있는 도우미가 꼭 있어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으로 하느님은 종일 두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