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겸손 - 박춘식 나는 겸손이 되려고 이른 아침부터 겸손을 생각한다 하늘에게 인사하고 두 손으로 흙 품 만지며 지구에게도 아침 인사를 한다 하늘과 땅이 새큼한 겸손을 건네주면 새들은 아침 겸손 날개를 펴고 나무들은 겸손 가지를 하늘로 치켜든다 별이 눈을 감는 아침은 겸손이다 — 라고 생각하면서 잠잠한 겸손을 만나는 일이 첫 일과이다 &mdas
뜨거운 선물- 박춘식 6월 1일 금요일 2012년 오늘 아침 해가 구름을 껴안고 마당까지 왔을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 오늘 너에게 좋은 선물을 주겠다 느닷없는 말씀에 얼이 빠지면서 퍽 엎어진다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환하게 땅에 닿고 이어 그 빛줄기는 사다리가 되어 예수님이 내려오신다 — 내 아들을 선물로 줄 터이
삼위일체- 박춘식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맑은 호수 착륙하는 소나기의 싱싱한 난무 하얀 수증기가 구름으로 오르는 깃털 소리 생명 가득, 물 가득, 바람 가득 채우시는 그분은 사랑 안에 사랑 밖에 온 사랑이리니 땅 사람 끌어 올리는 일을, 하늘 아버지 이름으로 죄인을 위한 십자가의 피눈물은, 하늘 아드님 이름으로 새 바람으로 이끄는 혼의 구원은, 하늘 성령님 이
돌로 된 마음- 박춘식 제 마음 안에 돌멩이들이 가득합니다 미운 사람에게 던지거나 심술궂게 강아지를 혼내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 마음이 느닷없이 송곳으로 변하면 사람들의 가슴을 꾹꾹 찌르는 상상도 합니다 마음을 사탄에게 빼앗겨 가족을 외면하고 회개를 미루는 완고한 돌덩이가 되어 하늘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제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어디 가든 부
비닐하우스 성당 / 정호승 봄이 오면 배추밭 한가운데 있는 비닐하우스 성당에는 사람보다 꽃들이 먼저 찾아와 미사를 드립니다 진달래를 주임신부님으로 모시고 냉이꽃을 수녀님으로 모시고 개나리 민들레 할미꽃 신자들이 일개미와 땅강아지와 배추흰나비와 저 들녁의 물안개와 아지랑이와 보리밭과 함께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흙바닥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구럼비야 구럼비야- 박춘식 제주는 하느님의 맑은 눈 파도 하얀 물보라로 씻고 뭍의 나무 향기로 닦는 눈동자 외통수 아집만 가진 이들이 매캐한 화약 연기 다래끼를 만들고 기름 시꺼먼 안약을 퍼붓다니 청정 그 바닷물로 청향 그 바닷바람으로 청순 그 바다 돌덩이로 청청 그 하늘빛으로 강정아 본래대로 돌아오너라 강정아 본래대로 돌아오너라 얼른 돌아오너라 구럼비야
엄마가 없다 -박춘식 며칠 전, 집 나간 엄마 때문에 아프다 시골 중학교 선생님의 쨍쨍한 수업 소리 그 말씀이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 학생 일어섯 — 왜 집중 안 하는 거야 부르르 떨면서 무겁게 일어서는 여학생은 선생님을 노려보더니 외친다 또박또박 — 나 는 엄 마 가 엄 따 꽉 막힌 목울대, 교실 밖을 나선다 집으로 가
하느님을 만나면 -박춘식 느닷없이 어느 날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나자렛 아씨를 생각해야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복음서 1:38) 끝없는 하늘을 땅으로 끌어 내린 이 말씀 마리아, 예쁜 아씨 고이 모은 두 손안에 빛나는 성시(聖詩) 빛나는 겸손 겸손이 하심에게, 박춘식, 들숨날숨, 167쪽
마음의 하늘 - 이정우 나는 날마다 몸이 아파서 내 마음 속 하늘로 들어가 비딱한 모잘 하나 쓰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내 몸 또한 모자가 기울어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게 얼마나 편한지요, 하느님. 때론 마음마저 어지러운 날엔 마음의 하늘을 들여다볼 수도 없고, 이 세상 바람 그 한가운데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몸짓으로 그냥 똑바로 서 있으려고 애쓴답니
겸손 8-박춘식 물 스승님 얼굴 없지만 어디든 계시는 그리고 우리 몸속 가득 계시는 스승님 흙 스승님 천 가지 만 가지 얼굴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지켜주시는 스승님 바람 스승님 겸손의 향기를 옮겨주면서 어디든 함께 가고 늘 한발 앞서 날아다니는 스승님 호수 물가에 가면 세 분 스승님을 함께 만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한 곳도 갈릴래아 호숫가였다 &
그분은 늘 살아계십니다 -박춘식 저도, 종려나무 가지 들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옷을 깔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빌라도의 이 한 마디 순간 제 무릎이 망가졌습니다 제 마음이 길바닥에 산산 조각났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벅차게 꿈꾸던 기다리던 왕국도 사라졌습니다 소름 끼치는 칠흑 예루살렘 그리고 참담한 끝장 그날
하느님의 빵 - 박춘식 아무리 특별한 빵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 빵을 만드는 데 33년이라면 그는 완전히 실성한 사람이다 세상에 어리멍청한 그런 제빵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미치고 안으로 미치고 온통 사랑으로 미친 빵, 밀가루 반죽 30년을 쫀득쫀득 마친 다음 뜨거운 사막 햇살 노릇하게 40일간 구웠다 그리고 3년에 걸쳐 시식과정을 마친 빵, 이
십자가 길 2 - 박춘식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말하는 (요한복음18:36) 예수님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로마 총독이 명령한다 예수를 저 세상 왕으로 등극시켜라 ‥‥ 새 왕국 깃발을 올릴 십자가 깃대를 짊어지신 예수님 너무 무거운 깃대 때문에 넘어지신다 어머니는 치솟는 눈물로 아들 얼굴 닦아주시고 행차를 구경하던 시몬이 깃
요셉 성인님- 박춘식 밤의 어둠을 접어가며 고민하다 조용히 물러서려는데 천사가 나타나 벽력같은 말씀을 주신다 고개 숙이는 묵묵한 그 남자 하늘의 뜻을 겸허하게 받들어 가며 어느 별빛 찬란한 밤, 하늘 아기랑 환하게 웃고 어느 별빛 가득한 밤, 하늘 아기 안고 피난길 걷는다 회당 의자 사닥다리 가구 문 나무의 장인 나무를 엄청 사랑하는 나무 성인 나무 기도하
지구는 겸손이다- 박춘식 그렇구나 겸손의 스승인 흙을 껴안고 나무들을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피부로 풀꽃들을 가꾸고 있으니까 그렇구나 바닷물 강물 개울물이 지구의 가슴이니까 가장 부드러운 겸손 가슴이니까 그리고 하얀 구름은 젖 가리개이니까 그렇구나 바람을 팔다리로 삼아 온갖 물상을 맞붙잡고 다니니까 그렇구나 지구는 몸이 동그랗고 낮밤으로 동그랗게 맴돌면서 쉬
겸손을 구하는 기도- 박춘식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주님 *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길 때 먼저 겸손을 두 손으로 꼭 잡게 하소서 칭찬이나 사랑 받기를 원하고 있을 때 겸손을 더 원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기쁜 일이나 도움을 바라고 있을 때 겸손을 간절히 바란다고 생각하게 하소서 충고 비판 욕설을 피하려고
십자가 길 1 -박춘식 오만 가지 죄들이 올라갑니다 칼 창 방패 로마의 힘이 번쩍거립니다 죄 없는 청년이 피범벅 되어 올라갑니다 수많은 죄인이 뒤따라 갑니다 십자가 나무가 십자가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큰 쇠못과 굵다란 노끈이 올라갑니다 망치도 사닥다리도 나무토막들도 올라갑니다 모두 해골산으로 올라갑니다 교만이 목을 뻣뻣하게 세워 올라가고 시기 질투 증오도
봄길-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흘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하여- 박춘식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내 팔이 길어지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빛이 생겨라, 하네 내 안에 하느님이 나를 위해 오늘을 시집으로 만드시고 나를 위해 성경을 환하게 새로 쓰시고 나를 위해 겸손을 다시 보여 주시고 나를 위해 교회를 나직하게 다듬으시네 꺽꺽한 교회를 부드럽게 굽히려고 애쓰시네 오며 가며 온종일 사람에게 나무에게 바람에게 날개에게 나
겸손이 봄을 만든다- 박춘식 개울 바닥 얼음장 위로 포근히 지나가는 햇살이 하품한다 눈물 글썽 미끄러지는 물 방울들 똑 똑 똑 떨어진다 봄, 하느님의 불꽃놀이 나뭇가지 마구 흔들어 앙상한 신호를 땅속으로 내려보내면 가느다란 수염뿌리들이 다투어 물 가루를 끌어모으고 있다 겨우내 졸고 있던 물관들이 물 가루를 힘껏 들이빨아 눈을 위로 떠밀어 올린다 겸손이 실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