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리신학연구소가 창립 15주년을 맞았다. 창립 준비 단계부터 깊숙이 관여해온 나는 특별히 감회가 깊다. 5년 전, 명동성당에서 10주년 기념잔치를 할 때, 앞으로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는데 용케 15주년을 맞은 것이다. 용하다는 표현이 맞다. 나는 하객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면서 우리 연구소가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
중단했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고 나서 몇몇 가까운 동무들로부터 내 글이 매번 너무 무겁고 비판적인 내용으로 일관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늘은 좀 가볍고 재밌는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마음처럼 잘 될지 모르겠다. 벌써 몇 달 전, 동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이것 한번 들어보라며 틀어주는 노래, 많이 들어 귀에 익은 목
예전엔 찰고(察考)라 했다. 대략 6개월 정도 걸리는 예비신자 교리교육이 끝나면 출석부를 점검하고 그동안 배운 내용을 물어보고 기도문도 외워보도록 해서 세례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찬찬히 짚어보는, 일종의 자격시험이다. 찰고는 꼭 세례 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성사(예를 들면 첫영성체, 견진, 혼인, 부활 성탄 판공성사 등)를 받기 전에 꼭 치러야 하는 필
대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다. 그건 분명히 기적이다. 사건이란 표현은 오히려 적절치 않다. 전남 나주에 있는 어느 성모상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소문과는 다른 차원의 기적이다. 내가 지금 대구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대구가 아니라 경북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대구대학교 이야기다. 그 대학에서 지난 9월17일, 제10대 총장에 당선된 사회학과 홍덕률 교수의
작년 성탄절에 나는 서울강남성모병원 마당 한 구석에서 병원의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성탄미사를 드렸다. 그 소식이 한겨레신문에 사진과 함께 보도되자 나는 여기저기서 참 많은 말들을 들었다. 사제로서 할 일을 했다는 지지와 사제는 교회의 일원인데 이건 조직에 대한 반기라는 반대의 목소리다.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때 서울 땅에서 하필이면 인천교구 소속인
ㅎ씨는 37세, 여성이다. 미국에서 8년간 의상디자인을 공부하고 돌아와 서울 변두리의 한 중소의류수출회사에 어렵게 취직해서 일한지 3년이 되었다. 정규직 과장이다. 허구한 날 새벽 6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서 밤 11시에야 돌아오고 토요일도 일요일도 툭하면 특근이니 연애는 물론 맞선 한번 제대로 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아직도 본의 아니게 미혼이다.ㅎ씨는
신종플루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선전이 잘 됐다. 처음에는 돼지독감이라고 하더니 어느 틈엔가 명칭이 슬그머니 바뀌었다. 양돈업자들의 반발이 있었단다. 사망자 수가 점점 늘어나는가 하면 감염 속도가 서서히 줄어든다는 소식도 들린다. 치료에는 타미플루라는 약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그것을 비축해두지 않아서 턱없이 모자란단다. 게다가 어떤 이는 그 약을 먹고 오히
존경하는 주교님들께 드립니다. 삼국지 류의 사극 영화를 보면 황량한 들판에 양쪽 진영이 팽팽히 맞서서 한 판 승부를 가리려 할 때 맨 앞에 말을 탄 왕들의 기싸움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처음엔 용감하게 자원하는 장수를 내보내서 적장과 싸우게 하지요. 그 일대 일 대결이 불리하다 싶으면 또 다른 지원자를 내보내고 그것도 안 되겠다 싶으면 이번에는 자기가 평소
열흘 전 쯤, ㄱ스님이 전화를 했다. 총무원장 선거에 나가야겠다는 것이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내게 그의 묵직하고 다소 느릿한 목소리는 이랬다. “절마다 온통 돈독이 올랐습니다. 불교가 자본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총무원장이라도 해서 ‘그건 아니다’라고 할랍니다.” 한국불교 조계종 총
“선배는 절대로 주교가 못 됩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건 문제가 없는데 선배한테는 영성이 없어요. 본인도 인정하시죠?” 언젠가 나보다 꼭 10년 늦게 신부가 된 후배가 생맥주집에서 내게 한 말이다. 요즘 우리 교구에도 새 보좌주교에 대한 소문이 심심찮게 돌고 있는 터다. 허, 참. 내가 언제 주교가 되고 싶다고 했나? 그런 건 단 한번
ㅂ 신부님. 깜짝 놀랐지? 내가 뜬금없이 편지를 다 보내니 말이야. 할 얘기가 있으면 조용히 만나 소주 한잔하면 될 것을 굳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쓰는 까닭이 궁금하지? 실은 내가 최근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은 어떤지,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야. 나도 판단이 잘 안 서거든. ㅂ 신부님은 &lsquo
그는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나이는 족히 일흔은 돼 보였다. 그는 내가 김포성당에 살던 1990년 당시 고촌면의 한 외딴 곳, 다 쓰러져가는 양철집 단칸방에 꼭 그만큼 늙고 꾀죄죄한 할멈과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가 거기 산지는 몇 년 되었지만 아무도 그가 영세한 신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어찌어찌 그가 천주교신자이고 영성체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가을을 타는가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아침저녁으로 갑자기 쌀쌀해져서 이불을 바꿔 덮은 게 엊그제고 낙엽은 아직도 먼데 올해는 왜 이렇게 벌써부터 사방이 텅 빈 듯 고요하고 쓸쓸할까? 걷기를 좋아해서 논길을 따라 두어 시간씩 걸으면 가을바람에 논은 어느덧 황금빛으로 출렁이고 농수로 옆으로 갈대와 억새풀들이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춤을 춘다. 마구 떠오르
일찌감치 은퇴하셔서 농사짓고 사시는 정호경 신부님은 내게 사목현장을 떠나면 전각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강추’하셨다. 그 이유는 실내 작업이기 때문에 계절이나 날씨에 구애되지 않고,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나 넓은 공간이 요구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도 돈이 별로 안 든다는 것이다. 이웃에 노인 영감이 사는데 긴긴 겨울밤에 잠은 안 오고
최근 1~2년 사이에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사제도 정년이 있습니까?” “신부님은 언제 은퇴하세요?” “은퇴하시면 무얼 하실 겁니까?” “사실 곳은 정해져 있나요?” “연금이나 생활비는 나옵니까?” 은퇴 얘기다. 혼자 사니까
모처럼 낯익은 필체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벌써 오래 전에 환갑을 넘긴, 나와는 30여년 지기 ㅎ아무개님이다. 봉투 안에는 “아들한테 야단맞고 기뻐서(?), 다시 호신부님으로부터도 꾸중들을 것을 알면서 ‘아들이 엄마에게 보낸 편지’를 부칩니다.”라고 쓴 쪽지와 함께 아들 ㅇ아무개(30대, ㅈ대학교수)의
문규현 신부가 전화를 했다. 지난번 서울 시청 앞에서 천막치고 단식할 때 보고 처음이다. 이번에 평양 갈 거냐고 묻는다. 나는 안 가는데 사제단과 평화삼천이 따로따로 사람 모아서 마치 줄서기하는 것처럼 연이어 가는 모양새가 안 좋다, 어쩌다 그렇게 됐느냐고 했더니 내 말은 들었는지 말았는지 “나 이번에 또 일 저질렀네.” 하는 것이다.
내 방 온도는 연일 32도를 웃돈다. 올 여름 더위는 유난히 더 심하다. 이 찜통방을 핑계로 훌쩍 사제관을 떠나 용인에 있는 ‘행복한 집’에 가서 며칠 머물다 왔다. ‘행복한 집’은 인보성체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전문 요양원인데 거기 살고 계시는 분들은 치매나 중풍에 걸린 무의탁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2년 전에
오늘은 또 무슨 기사가 실렸을까?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다음부터는 아침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신문을 펼쳐든다. TV를 잘 안 보는 내게 신문보기란 꼭 예전 논산훈련소 시절에 수류탄 안전핀을 뺄 때처럼이나 두렵고 떨리는 일과가 되었다. 대운하 건설이나 각종 공영사업들의 민영화 정책에 가슴이 쿵! 했는데 미국에서 미친 소를 수입한단다. 촛불의
는 내가 사는 부천시 고강동 천주교회 부설로 지난 해 11월에 문을 열었다. 몇 달 동안 시범수업을 하면서 학생을 모집해 금년 3월에 정식으로 개교와 함께 입학식을 한 학교다. 가르치는 봉사자 선생님이 5분(40~50대 전업 또는 맞벌이 주부)이고 학생 총원은 현재 43명이다. 주로 환갑이 넘은 할머니들이다. 개중에는 40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