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이 마을로 집을 보러 왔을 때, 지금 우리 집보다 훨씬 탐나던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오래된 돌담이 빙 둘러져 있는 데다 뼈대가 튼튼해 보이는 흙집이라 딱 내 취향이었다. 게다가 여러 가지 꽃나무가 자리한 앞마당과 정돈된 뒤뜰까지! 오랫동안 내가 꿈에 그려온 집이 바로 거기 있었다.그때까지만 해도 마을 사정에 눈이 어두웠던 나는 그 집이 관리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 줄 모른다. 그건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제대로 키워본 경험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림책이나 만화영화 속에 나오는 동물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동물은 멀리 있을 때만 귀엽다. 가까이 다가오면 무섭기도 하고, 더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얼른 피해버리곤 한다.이제라도 동물을 키워보면 좀 달라질
지난해 가을이었다. 가을걷이가 막바지에 달해 들판이 휑하니 비어갈 무렵,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났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섬뜩한 푸른빛까지 감도는 게 그리 인상이 좋은 편이 못 되었다. 하지만 넉살이 어찌나 좋은지 슬그머니 다가와서 나에게 말을 붙였다.“아따, 이 동네에 젊은 사람이 다 있네요. 살만 하요? 저는 저 끝집
모처럼 한 줄기 바람에서도 따사로움이 전해지던 봄날, 나는 다울이, 다랑이와 함께 들마루에 앉아 햇빛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집 한평 아주머니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소리치며 말씀하셨다.“어여 가자고! 애들 데리고 산에 가서 머굿대 한 주먹 뜯어 오자고!”“머굿대라면 머위요? 머위가 벌써 올라왔을까요?”“몰러 나도. 산보 삼아 한번 가보자고!”아
꽃망울을 머금었던 꽃나무가 어느새 활짝 핀 꽃을 매달고 있을 때, 하루가 다르게 눈부시게 짙어지는 나뭇잎의 푸름을 볼 때, 나는 꼭 마술에 걸린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눈을 떼지 않고 잠자코 바라본다면 마술의 비밀을 알아챌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 자연의 변화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면
예년 같으면 2월이나 3월이 되어야 트랙터나 경운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올해는 1월부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산에 오르다보면 볕이 잘 드는 길가엔 벌써부터 쑥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벌써 봄이 온 건가? 이런 식으로 겨울이 짧아져버리려나?마을 분들은 겨울이 춥지 않으니 올해 농사가 더 힘들어지겠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울이 겨울
겨울철 농한기를 맞아 우리 마을회관이 문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밥을 차려먹던 이웃들이 한 상에 마주 앉아, 함께 밥을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회관 앞 댓돌 위에 신발이 옹기종기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며 ‘여기가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하고 느낀다. 전기밥솥이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만 말해
아무리 생각해도 콩 농사만큼 어려운 농사는 없다. 싹이 올라올 때는 비둘기가, 잎이 나기 시작하면 토끼나 고라니가, 콩을 가만 두질 않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올 여름엔 날씨가 무덥고 지독히도 가물었던 탓인지 별별 종류의 노린재가 대거 출현! 콩 꼬투리를 쪽쪽 빨아 먹었다. 다울이 아빠가 이른 새벽마다 밭에 나가 하루에 백 마리 이백 마리씩 노린재를 잡았지
해마다 가을걷이가 채 마무리도 되기 전에 겨울을 맞는다. ‘어어,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좋겠는데……’ 하고 허둥대는 사이 겨울이 불쑥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는 겨울 오기 전에 안방 창문에 커튼도 새로 해 달고 겨울옷 정리도 해야지 하는데, 당장 급한 일이 아니고는 그냥 넘어가게 된다. 날이 추워지니 일단 땔감 하는 일이
다랑이를 데리고 나가면 마을 할머니들이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워따 마이 컸다.”“긍게 말이여. 참말로 마이 컸네.”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저렇게 작은 아기를 보고 많이 컸다고 하는 게 이상하게 여겨지리라. 같은 달수 아기들에 비하면 아직도 다랑이는 많이 작은 편이니까. 하지만 다랑이를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다랑이의 성장을 기적처럼
가을은 발자국 소리가 크다. 그 소리에 놀라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간다. 어제보다 더 붉어진 감, 어느새 입을 쩍 벌린 채 땅으로 떨어져 내린 밤송이, 풀숲에 숨어서 자라다가 ‘나 여기 있지!’ 하며 갑작스레 존재감을 드러낸 누런 호박….아무래도 우리가 안 보는 데서 가을이 어서 부지런히 결실을 맺으라며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 집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다울이가 9월부터 유치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죽마고우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그 얘길 했더니 친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야, 너 학교도 안 보낸다더니!”그렇다. 귀농 세계에 입문을 하면서부터 아이를 낳게 되면 당연히 학교에 안 보내겠다고 작정을 했다. 자연이라고 하는 너른 배움터가 있는데 굳이 학교에 보낼 필
마을에 살다 보면 말이 통하는 이웃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농사며 음식 만드는 거며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 나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심전심의 기쁨을 맛보는 가운데 큰 위로를 받고 새 힘이 솟는 것을 느
지난해 여름엔 장마 끝나고 난 뒤 냇가에 물이 철철 넘쳐서 날마다 빨래하러 다니며 더위를 이겨냈다. 나무그늘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아 놓고 차디찬 냇물에 발 담그고 앉아 빨래를 하고 있으면 폭염주의보니 경보는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그냥 노는 게 아니라 놀이 삼아 빨래까지 해치우니 시원한 맛이 배가 된다.그런데 올해는 장마 때도 장맛비다운
한평 아주머니댁에서는 요즘에도 종종 거친 말다툼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그것은 대개 들에서 일하고 온 아주머니의 잔소리와 푸념으로부터 시작된다.“아이고 죽겄다. 나는 죽어라 일만 하는데, 일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밥만 따박따박 받아먹고 말이여. 집이서 테레비만 죽자고 보면 밥이 나와 죽이 나와….”“조용히 해라. 가만히 안 둔다.”“귀는 뚫려서
귀농 첫 해 빼고는 된장을 손수 담가 먹어보지 못했다. 해마다 야생동물 때문에 콩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콩나물 대가리 같은 싹이 얼굴을 내밀 때는 비둘기가, 잎이 어느 정도 자라기 시작하면 고라니나 토끼가 콩잎을 죄다 뜯어먹는 통에 씨나 건지면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그러니 된장이나 청국장 담가 먹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었고, 푸
눈길 가는 데마다 일이 보인다. 밭에 무성한 풀은 물론이요, 밀린 이불 빨래, 어수선한 부엌까지 할 일은 많은데 뭐 하나 시원하게 해치울 수가 없다. 어쩌다가 다랑이가 누워서 노는 틈에 이 일 찔끔 저 일 찔끔 건드리기는 하지만,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지 못하고 아이에게 달려가야 한다. 가끔은 아이를 품에 안은 채 풀을 매고 밥 준비를 하기도 한다
다랑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한 달 사이에 1킬로그램 가까이 몸무게가 늘었으니 정말이지 놀랄 만한 속도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두 달도 더 된 아이가 3킬로그램 정도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고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그러면서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아무래도 엄마 젖이 모자란 것 같다며 분유 먹여서 키우라는 것
올해도 어김없이 모내기철이 돌아왔다. 논마다 물이 그득 차고, 그 논에 모가 폭폭 꽂히면 내 마음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메말랐던 가슴에 생명의 기운이 쫙 번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군가 내게 농사일의 백미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모내기라고 말하겠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허리가 꼬부라질 만큼 모를 안 심어봐서인지도 모르지만 말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동안은 둘째부터는 모든 게 쉽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 낳는 것부터 훨씬 수월했을 뿐더러 산후 몸 회복도 빠르고 젖몸살도 없이 지나갔다. 한밤중에 몇 번씩 깨어 아이에게 젖 먹이는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쯤이야. 첫째 키울 때에 비해 여유가 생기니 아이 예쁜 것도 알겠고, 그 맛에 어지간히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몰랐다.다만 커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