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없이 시작과 끝을 경험합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면서 그 끝을 상상하며 우리는 살아갑니다. 무언가 일을 계획할 때에도, 책을 한 권 보더라도, 드라마를 보더라도 우리는 나름대로 그에 대한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람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끝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그 수많은 끝이라는 경계는 우리에게 때론 희망을, 때론 아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미 근원적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끝을 희망하지만 그 끝을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순교라는 정말 숭고한 말이 우스갯소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작년 10월에 한 저명한 목사님이 자신에게 기름 부음이 임했다며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한 사실이 다시 한번 부각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 그 발언이 있기 전 ‘대한민국은 10년간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이미 서두를 꺼내기도 했습니다. 지난 강론 때 이미 언급해서 다시 이야기하기가 머뭇거려졌지만 순교라는 신비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이번 주일, 이 목사님이
얼마 전 동기, 후배 신부님들과 사제관에서 소주 한잔 기울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작년 12월말에 서품받은 신부님도 계셨습니다. 이 신부님이 아직 어린이 미사도 드려 보지 못하고, 자기 본당의 주일학교 아이들도 잘 알지 못할 때였습니다.(사실 지금도 크게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임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가 중단되었고 사제가 되고 나서 맞이한 첫 부활 대축일도 주임신부님과 수녀님들과만 지낸 셈이지요. 이 신부님이 한 이야기 중에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님 저는 서품받고 나서 처음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더울 땐 무언가 간단한 것을 찾게 되지요. 오늘 글도 조금 간단한 방식으로 진행해 볼까 합니다. 명언 좋아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명언을 외우고 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삶에 자극이 되는 문구가 있으면 하루 이틀쯤은 되새기며 그 뜻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하도 볼 책이 없어서 진중문고에 있는 어느 잡지를 훑어보다가 발견한 한 문구로 오늘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이 문구는 방송이나 자기개발서 그리고 자기소개서 잘 쓰는 방법 등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명언이라고 하는데요. 유대인이면서 영국
홀로 기도를 자주 하십니까? 질문을 조금 바꿔 보겠습니다. 홀로 기도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십니까?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피정에 대한 세 가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Intrate toti) 홀로 머물러라,(Manete Soli) 다른 이가 되어 나가라.(Exite Alii)” 그렇게 홀로 머물며 기도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힘든 것이 바로 혼자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혼자 기도를 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오늘 2독서의 첫 구절을 보며 문득 얼마 전에 군종사제로 임관한 한 동기 신부가 생각났습니다. 사제서품을 받기 전 이를 기념하는 상본을 제작하면서 자신의 서품 모토 문구를 정합니다. 저와 동기들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면서 길라잡이로 삼을 문구를 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 신부가 오늘 독서의 첫 구절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서품받기 전 자신의
이곳 감물생태학습관에 온 지 10개월째입니다. 사실 말이 좋아 10개월이지 작년 10월에 와서 겨울까지는 피정이나 연수, 캠프등을 진행했지만 2월 말부터는 아무 행사도 하지 못하니 부관장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낙제점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학습관의 가장 큰 행사중 하나인 여름신앙학교도(9차수까지 계획했으나) 못하는 현실이니 아마 올여름 저희 집은 아주 조용할 것만 같습니다. 아이들의 소리와 발자국으로 정신없어야 될 여름. 어떻게 보면 그 여름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로그램에 대한 구상을 해 보고 이런저런 아
6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벌써 한해의 절반이 지나간 셈이지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송두리째 날아간 것 같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갑니다.아직까지 모든 것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아니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시간은 흐르고 삶의 곳곳에서 회복의 희망이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지요. 조심스럽고 아주 천천히지만 본당공동체가 다시 회복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많은 교구들이 미사만 재개했다가 이제 조금씩 교우들의 신앙
이번 주일, 교회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에 집중하는 대축일을 지냅니다. 교회는 이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의 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더불어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끔 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도와 신심들이 있겠지만 성체성사야말로 신앙의 모든 측면에 있어서 원천이 되며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당연히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만
부활시기를 마무리하는 날에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성령 하느님께서 내려오신 사건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공동체가 굳건하게 됨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부활시기 내내 평일과 주일을 가리지 않고 1독서로 들었던 사도행전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강림 대축일을 교회가 시작한 첫 순간으로 기억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한국 천주교 예비 신자 교리서"의 설명이 잘 되어 있어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가득
얼마 전에 결혼을 앞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는 그 친구의 배우자가 될 분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왜 저를 보자고 불렀는지 물어보니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냥 자랑하고 싶었답니다. 저는 그저 어이없는 웃음만 지었지요. 그들의 모습은 서로밖에 모르는 여느 커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결혼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던 그 친구가 결혼한다는 게 저는 왜 이리 신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앞에 둔 채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보기 힘든 흐뭇한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말을 꺼내면 자동적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
2018년 3월 한 원로 신부님께서 사제들이 받아 보는 한 소식지에 ‘신학교가 너무 많다’라는 글을 기고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요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부산신학교가 내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고 지원자들을 모두 대구와 광주의 신학교로 보내기로 했단다. 신학교 문을 닫을 날이 머지않다는 말인가? 지원자가 현저히 줄어서 정원을 채우기 어렵고 그나마 몇 안 되는 신입생들은 수준이 떨어져 수학 능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니 독립적인 신학교를 운영하는 게 여러모로 득보다는 실이 너무 크다는 게 이유다.” 이 글을 읽
무언가 아쉬움이 가득한 부활시기입니다. 평소엔 성당에 잘 나가지 못해도 부활 대축일만큼은 빠지지 않고 성당에 가려고 하는 분이 많지요. 그러나 올해 부활 대축일은 대부분의 교구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 제한 조치가 연장된 상태에서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아쉬움 속에서 부활 8부 축제의 마지막 날인 부활 제2주일을 맞이합니다. 이날이 되면 적지 않은 분이 고해성사를 보러 고해소를 찾으십니다. 사순시기에 판공성사를 못 보신 분들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에 일부러 고해소를 찾는 분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습니다. 요한
성주간을 시작하며교회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성주간을 맞이합니다. 이 기간 전례는 주님의 부활을 앞두고 그분의 수난 여정과 죽음을 묵상하게끔 인도합니다. 교회는 성주간 속에서 두 번에 걸쳐 주님의 수난 여정을 전례 속에서 기억합니다. 이번 주 맞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각 해의 전례력에 맞게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이 봉독되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왜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러한 고통의 여정(Via dolorosa)을 체험하셔야 했
‘신자(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단된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미사가 언제 재개될지 아직 명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선교나 교포사목으로 외국에 가 계시는 선배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보면 다른 나라들의 상황도 녹록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요 교황님이 계시는 바티칸 역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와 성삼일 전례를 ‘신자들과 함께’(Cum Populo)가 아니라 신자들의 참례 없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 신
나보다 강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 강함이 물리적 강함, 영적인 강함 등 그 종류에는 상관없이 나보다 강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성경 속 이야기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를 탈출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파라오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흘 동안 어둠으로 이집트 온 땅을 덮었던 아홉째 재앙 이후 파라오와 모세가 마주한 자리에서 파라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미사 경문 중에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거룩함’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함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세속에서 살아가는 나와는 크게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신가요? ‘나도 거룩함을 추구해야 되지만 그게 뭐 쉽나’라는 생각들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 각자가 뭔가 말로 표현
‘위기의 교회’, ‘교회의 미래가 어둡다’. 요즘 참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다. SNS 등 각종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교회의 모습을 비판하고 걱정하는 분들의 모습을 많이 발견합니다. 작게는 본당 신부님과 본당 공동체의 모습에서 크게는 한국 교회의 미래 그리고 가톨릭 자체의 모습을 바라보며 거기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는 분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거기에는 교회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이고, 안타까움도 있을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도 적지 않게 있어서 저부터 교회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경자년 설을 맞습니다. 올 한 해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의 복을 빌어 드리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제보다 부디 하느님의 복을 더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대신 내 아들과 딸, 내 남편과 아내보다는 조금 덜 받으시고 저보다는 몇 배 복을 더 많이 받으시면 좋겠습니다.우리는 흔히 설이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를 위해 인사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역에 가 보니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소 어색했던 그 인사를 한동
이번 주일 기념하는 주님 세례 축일로 교회는 성탄 시기를 마무리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주님 세례 축일이 왜 성탄시기에 속해 있는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성탄과 공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신학적 의미인 ‘주님께서 세상에 당신을 드러내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세상에 새로운 구세주가 오셨음이 알려지는 사건이 성탄이라면, 공현은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가 전면에 등장합니다. 교회전승은 동방박사 3명-멜키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