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 보니 신랑과 내가 부부 연을 맺은 지도 9년째다. 그동안 살면서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만났나 땅을 치며 후회를 하기도 하고, 죽기 살기로 물어뜯고 싸운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세월 동안 큰 사고(?) 없이 함께하고 있음이 놀랍다. 나는 내심 '저 사람은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났으면 진작 홀애비 됐을 거다. 그러니 마음속으로는 나를 고마워하고 있겠지.' 했는데 어느날 내 친구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신랑이 이런 식의 말을 했다."저는 결혼해서 살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하게 됐어요. 이혼하는 사람,
목구멍으로 악 소리가 나오려고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 가며 여름을 났다. 아이가 셋, 강아지가 일곱,(원래는 아홉 마리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두 마리가 죽었다.) 휴가철을 맞아 보름 가까이 손님 치레... 그러한 와중에 다랑이가 심한 배탈이 나서 일주일 가까이 앓았으니 밥 지으랴, 개밥 하랴, 죽 끓이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괜찮아지겠지
우리 집 개 보들이가 엄마가 되었다. 마을 할머니들 말로는 개는 짝을 짓고 딱 두 달 만에 새끼를 낳는다는데 배는 진작부터 아주 무거워 보였기 때문에 오늘일까 내일일까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개도 출산이 임박하면 몸이 무거운지 잘 움직이지도 않는구나. 얼마나 힘이 들까. 개도 새끼 낳을 때 많이 아프겠지? 첫 출산이라 모든 것이
단비가 내렸다. '행여나 온다고 하고 안 오면 어쩌지? 찔끔 오다 마는 거 아니야?' 하는 온갖 걱정을 무색케 하며 짜락짜락 쏟아졌다. 비만 오면 걱정이 없겠다 했으니 정말 걱정이 없구나 했는데 이게 웬일, 이번엔 두드러기 사태다. 낮잠 자고 일어난 다랑이가 "엄마, 너무 가려워." 하면서 이마를 득득 긁으며 일어나 나오길래 쓰윽 봤더니 이마에 커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던 게 십여 년도 전일 게다. 그런데도 요즘 들어 자꾸 그 책 제목이 떠오르는 건 내 안의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다는 걸 알리는 적색 경보였다. "삐삐삐.... 두려움이 커지고 있잖아. 이런 식으로라면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어. 삐끗하는 순간 우주의 리듬과 박자를 놓치고 말 거야
"여그서 풀 잔 뜯어 가야겄다, 우리 닭 주게...."앞집 할머니가 우리 집 텃밭에서 풀을 한 움큼 뜯으며 말씀하셨다."아니, 왜 여기서 풀을 뜯어 가세요? 댁에는 풀도 없어요?""읇어. 다 약 쳤어.""닭 줄 풀도 안 남기고 약 치셨어요? 풀이 웬수도 아니고 도대체 왜....""웬수여, 풀은."할머니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풀
'쌀 한 톨의 무게'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다울이가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라는 대목에 이르자 노래를 뚝 그치고 나에게 물었다."엄마, 이 노래를 만든 아저씨는 왜 별이 외롭다고 생각했지? 별한테는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그건 말이지...."일단 입을 열기는 했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 뜸을 들였다. 별과 별 사이
마당에 서서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하염없이 기쁨이 차오르는 계절이다. 산에는 산벚나무 꽃, 돌복숭아꽃, 집집마다 개나리꽃, 동백꽃, 들판에는 개불알꽃, 광대나물 꽃, 애기똥풀 꽃.... 더구나 밭을 갈지 않는 우리 집은 더욱이 꽃이 지천이다. 은방울꽃, 냉이 꽃, 배추꽃, 목련 꽃, 민들레 꽃, 딸기 꽃, 보리수나무 꽃.... 온갖 꽃들과 눈을
"엄마, 나 껌 먹었다!"다랑이가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순간 누가 또 애들한테 껌을 줬구나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미간을 찡그리는데, 다랑이 표정을 보니 나를 놀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게 보였다."헤헤. 사실은 돼지감자 먹었지롱.""돼지감자?""사랑방 마루에 가 봤더니 벌써 다 말랐더라. 맛있는 거나 아니나 한번 먹어 보니까 껌 맛이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내게 부활절은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삶은 달걀을 먹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 하지만 관념 속의 축일이었을 뿐 크게 현실감을 느끼지는 못하고 살았다. 신앙심의 바탕이 자연의 흐름과 뿌리 깊이 연동되어 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숙맥이었으니까.그랬던 내가 귀농 10년차에 드디어 '유레카!' 하고 소리치게 되었
겨울에서 봄, 겨우내 안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큼지막한 고구마 상자를 들어냈다. 열 개 남짓 남은 고구마를 씨로 묻고 나니, 이제 고구마는 없다. 가을에 고구마 캘 때까지는 다시 이 맛을 보기 어렵겠지. 아, 아쉽다. 또한 설에 한 쑥떡과 가래떡도 몇 덩이 남지 않았고 김장김치도 곧 있으면 바닥이 날 기세다. 바닥! 얼마나 두려운 낱말인가. 두려움 때문
요즘 들어 다나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짝짝꿍 손뼉을 치며 "아빠빠빠" 소리를 치는가 하면 오빠들이 부르는 노래에 엉덩이를 들썩들썩 춤까지 춘다. 흥겨움은 생명의 본성인가? 그 앞에서 나는 애를 처음 키워 본 사람마냥 놀람과 흥분에 휩싸인다. 씨앗에서 막 터져 나온 새싹이 하루하루 몰라보게 자라는 것을 볼 때처럼 대견하고 신
아이들 예방접종만 안 시켜도 큰일 날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세상이다. 건강검진만이 암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사들의 경고가 진리인 양 받들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밥상이 혼탁해지고 있는 데는 이처럼 무관심할까? 진정으로 국민 건강을 생각한다면 날마다 마주하는 밥상부터 점검하고,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먹고 있는 것들이 과연 먹을 만한 것들인지 꼼꼼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내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라 했던가.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소리가 있으니 내 자식이 나를 위해 책 읽어 주는 소리가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얼마 전부터 다울이가 자발적으로 책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권씩 다랑이에게 책을 읽어 주라고 시키는데, 그럴 때 읽어 주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목소리다."엄마, 이거
지난 열흘 동안 나는 무려 7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는 강도 높은 부엌데기 수련을 했다. 서울에 사는 여동생과 조카들이 겨울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식구들이야 내 밥상에 익숙하고 이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걸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지만 더부살이 식구들이야 어디 그런가. 온갖 먹을거리가 넘치는 서울 한복판에 살다가 마트는 물론
지난 여름, 타들어 가는 콩밭을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여느 해 같으면 이파리가 너무 무성해지지 않도록 두세 번은 순지르기를 해 주어야 했을 텐데, 올해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콩이 저 스스로 잎을 더는 늘리지 않았으니까. 그저 가까스로 꽃을 매단 채 지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던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차
두 해 전 광주에서 침뜸 교육을 받으며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유방암으로 항암치료 끝에 완치 판정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친구였다. 그녀는 나와 동갑내기인데다 (당시만 해도) 아들이 둘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쉽게 친해지게 되었는데 내가 사는 삶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서 정말 좋겠어요. 저는 늘 꿈만 꾸는데 애기아빠가 시골 출신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모임을 하는 젊은 엄마가 있는데 아들을 낳고 육아에 전념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남편과 일을 바꾸기로 했단다. 바깥일을 하던 남편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하고, 자기는 밖에 나가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오기로 말이다. 그런데 아내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던 젊은 아빠가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고부터 석 달 뒤, 퇴근해서 집
나락 수확이 한창일 무렵, 우연히 장흥에 사는 지인이 올린 나락 수확 사진을 아이들과 함께 보게 되었다. 널따란 논에 열 명도 넘는 사람이 어우러져 함께 벼를 베는 사진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다울이가 말했다."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우리 아빤 혼자 다 하는데.... 정말 탐난다."여기서 탐난다는 건 정말 부럽다는 뜻이리라. 특히 올해는 신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