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 나는 말 없음의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책 읽는 것의 첫 번째 성취다. 이번에는 반대를 보려고 한다. 책을 읽는 자이기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잘못과 함정 말이다. 나는 이 함정을 피하고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이 주는 두 번째이자 더 값진 선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나, 조선소 노동자"를 읽어야 한다고 본다. 말-아님의 두 번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교양 있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이자 악랄한 실수가 여기서 발생한다.
선거가 끝났다. 예상했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결과다. 여당의 압승이다. 극우보수 야당은 몰락에 가까워졌다. 양당체제가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번에 다당제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입장이고 양당체제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보수 야당은 몰락했다. 어떤 식으로 수습할지 그조차 불분명해질 정도다.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의 주류 세력이 교체된 것일 수도 있고, 본격적인 보수정당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 주는 한 가지 분명한 결과가 있다. 그것은
아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트에서 과자와 젤리를 고르던 아이는 한참이 지나도 선택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뭐해? 아직도 안 골랐어?” “네, 엄마 아직요.” 아들은 대답하더니 이어 말했다. “전 결정 장애에요.” “뭐라고?”“결정 장애라고요. 뭘 잘 결정하지 못하겠어요. 젤리도 종류가 너무 많고 다 먹고 싶은데 한 가지만 고르려니까 너무 힘들어요.”순간 조막 만하고 작은 선홍빛 입술에서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 (하지만 당시 꽤나 유행어처럼 돌던 말이었다) '결정 장애'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조금
어느덧 푸른빛의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도처에서 죽음의 공포가 넘실대던 3월 어느 날 아침, 나는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채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작가 권혁란. 페이스북에서 친구관계로 맺어진 작가이지만 사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고 아주 가끔씩 짧은 댓글 정도만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관통해 온 시간의 무늬 같은 것이 내게도 깊게 배어 드는 기분이었다. 하루를 꼬박 세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기록들을 하
이 책의 첫 장을 읽을 때만 해도 우리 사회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권리가 예전과는 다르게 많이 향상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문제가 이렇게 책으로 나온다는 것은 의식 있는 개인들과 그런 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집단이나 공동체를 이루어 사회 전반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내 개인의 안온한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사건이 막 이슈로 떠올랐다. 한 가지는 트랜스젠더 여성 군인 문제와 얼마 전 문제가 된 모 여대 트랜스젠더 학생의 입학거부가
여기 문제적 소설이 있다.아니 문제적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소설. 세대와 계층, 노동과 노인 문제, 성소수자, 정상가족 담론 등 한국 사회의 여러 현실적 문제를 섬세한 눈길로 되짚는 소설.필자에게 이 소설은 한겨울 살을 에는 추위에 고독하게 문을 연 식당에서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먹는 일처럼 조금은 쓸쓸한, 동시에 데워진 몸 덕분에 잠시간 다정한 위안이 밀려오는 느낌을 안겨 준 소설이었다.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소설 속 주인공들 때문이 아니라, 이런 소설을 쓴 작가의 마음에서 나는 어떤 위안 같은 것을 받았다. 무엇이라고 정확히
이 책은 지난번 필자가 서평을 썼던 조한진희 작가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는 질병의 사회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차별과 배타, 혐오로 인해 배제된 이들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제목인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에서 ‘아픔’은 우리가 부당하게 겪은 사회적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아픔과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아픔과 상처에도 깊이 아프지 않길 바라는 저자의 염원을 담은 제목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런 표현을 썼다. “이 아픔
이 책의 저자인 존 니프시는 임상심리학자이자 신학자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명’에 관한 이야기다. 소명이라는 단어는 사람마다 다른 연상과 이미지를 불러온다. 대개 사람들은 소명이라고 하면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소명만을 떠올리거나 직업적 의미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지엽적이며 협소한 의미다. 소명은 가정, 연애, 일상적 취미나 관심의 영역, 정치적, 사회적 문제 등 삶의 모든 차원을 통틀어 우리가 시간과 자원을 들여 하는 모든 것에 해당되며 이는 소명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소명을 뜻하는 영어 ‘vocatio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흔히들 알고 있는 썸 탄다는 말이 있다. 5-6년 전쯤 이 말은 가요계와 대중매체에 갑자기 등장하면서 연인들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 서로 이 사람인가, 아닌가, 소위 말해 간을 보는 상태, 적절한 호감을 갖고 있지만 아직은 애매모호한 사이를 썸 탄다고들 했다. 심지어 사랑으로 골인하게 되는 연인관계보다 더 짜릿한 게 바로 이 썸을 타는 시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서로에게 이상적 자기 기준의 기대가 거의 배제된 상태로 상대의 모습 그 자체를 그저 설레어 하는 가장 순수한 상태이기도
“가슴 깊이 내면화한 물질적 이해관계를 털어내고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함으로써 완전한 적폐 청산을 이뤄낼 때까지 마음의 촛불을 끌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먼저 민주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해방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먼저 온갖 두려움이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부터 혁명’이 중요한 까닭이다."(156쪽)민주주의, ‘촛불’로 꽃피운 위대한 유산1980년 5월 광주를 비롯해 우리의 역사는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었다. 민주주의는 한국 현대사 내내 힘겹게 얻어 낸 위대한 유산이며, 그
“불의의 시대에 정의는 무엇인가, 비인간화가 판치는 시대에 인간다움을 위한 노력은 무엇인가, 무지의 시대에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가. 아집과 편집으로 가두어 놓은 자신의 동굴과 담벽을 허물어 사랑으로 함께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함께 찬찬히 풀어 가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인섭, '책이 나오기까지' 중에서 한 시대를 헤쳐 간 예언자적 삶의 기록들“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 것과 같다”라는 격언이 있다. 한 사람의 생애 안에는 세상을 둘러싼
태초에 혼돈과 암흑으로부터의 해방이 있었다. 하느님이 손수 만드신 것을 보니 모든 것이 참 좋았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알고 있는 이 창조 이야기에, “맞아, 모든 것이 참 좋아”라고 긍정할 수 있는가?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이 물음을 제기하면서 우리가 피조 세계를 찬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과 노동”을 쓴 목적이라고 한다.언뜻 어울려 보이지 않는 ‘사랑’과 ‘노동’ 두 단어가 한 제목으로 묶였다. 거기다 목적이 ‘창조를 찬미하는 것’이라니. 순간 머릿속에 이 그림이 바로 그려지지 않은 건, 이때가 홀로 일하다 기계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예수라는 청년이, 오래전 십자가에서 처형된 갈릴리 출신의 청년이 메시아라는 소리였다. 그가 유대 민족이 그토록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말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메시아를 죽인 당사자가 로마가 아니라 유대 민족이라는 것이다. 메시아를 가장 간절하게 기다리던 유대 민족이 그를 못 알아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였다고 했다. 정작 가장 기이하고도 놀라운 말은 그 다음이었다. 유대 민족도 알아보지 못한 메시아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 그것
2018년 여름의 위대한 더위가 사그라질 무렵 시작된 9월은 복음을 따라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순교자 성월로 지켜졌다. 특히 9월 20일은 1984년 성인품에 오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대축일이었다.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조선 천주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성지들이 조성되었고, 서울에는 절두산 순교성지, 새남터 순교성지에 이어, 서소문 형장에 조성된 서소문 순교성지가 국제 순례지로 승인
미래의 주인공과 함께하는 지구촌 환경 여행2135년에 소행성 베뉴가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를 들었다. 예전에는 혜성이나 행성이 지구를 들이받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했는데, 그것은 정말 기우다. 최근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지구의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도사려 있다. 2100년 지구 멸망설 시나리오에 낙심했던 영화감독이자 작가, 국제환경보호단체 콜리브리의 공동 창립자인 시릴 디옹과 프랑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는 멜라니 로랑은 영화 제작 후원금을 모으고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
여성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여성주의 신학은 비판 신학이다. 비판적 연구는 철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학적이든 늘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신학의 경우 초기 모순을 어떤 사람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가 물려받은 신 이미지 또는 신학적 해석 사이의 모순과 같이 삶의 체험에서 오는 모순과 물려받은 전통이나 해석의 두 측면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 즉 지적인 것에서 비롯하는 모순으로 경험할 수 있다. 모순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이 편한 것도 유쾌한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 중에 전쟁만큼이나 오랜 시간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폐허로 만드는 고통이 또 있을까....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만행으로 일어난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실화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 정부에서도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며 논의가 되는 역사적 문제지만 여전히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외면하는 사안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골이 깊고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발표함으로써 역사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전쟁이라 이제 생존자들이
세상을 뒤흔들었던 사나이“지위의 선택에 즈음하여 우리가 주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인류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완성이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때만이 자신의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 되어 있다.”여기서 ‘지위’는 각자 원하는 ‘직업’을 뜻하는데, 17세의 소년은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했다. 이 소년은 훗날 그 자신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대사상가가 된다.1818년 5월 5일에 마르크스가 태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일반인은 제외하더라도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신앙인들에게 신학은 어떤 의미인가? 연구소 후원자 모집을 위해, 혹은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구독자 모집을 위해 종종 본당에 나갈 때마다 만나는 본당 신자들에게 신학연구소나 신학 잡지는 그 아무리 대중적이고 쉽다는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나와는 상관없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는 모양이다. “오늘날 신학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것, 관심 밖의 것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근래에
2018년 평신도 희년을 맞아 필독서 두 권이 나왔다. 알베르 바누아 추기경의 “우리 모두를 사제로 삼으셨으니-그리스도인의 보편 사제직”(바오로딸)과 마산교구 이제민 신부의 “손 내미는 사랑-사제지만 사제인 줄 모르는 당신에게”(생활성서), 제목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곧 하느님의 사제임을 일깨우는 데 중점을 둔 책이다.베드로 첫째 서간에는, 그리스도인을 어둠에서 불림 받아 하느님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린 이들이라고 하면서,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2장 9절)이라고 한다. 즉, 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