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마을을 술렁이게 한 소식! 어떤 젊은 부부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 2만 평을 샀단다. 그리고는 그 땅의 나무들을 싹 베어 내고 호두나무를 심겠다지 뭔가. 그 넓은 땅에 온통 호두나무라니, 도대체 왜? 이 소식을 전해 준 겨울이 엄마 말에 따르면 군에서 호두나무를 심으면 각종 지원과 혜택을 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을 이장님까지도 자기 집 뒷산의 나무를 다 베어 내고 호두나무를 심을 거란다.그 소식을 들으니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군에서 펼치는 정책이라는 것이 어쩜
비가 안 오는 틈을 타서 얼른 집앞 텃밭에 나가 옥수수를 따 왔다. 아이들이 오매불망 기다려 온 옥수수다. 옥수수는 알이 단단하게 여물면 맛이 덜하기 때문에(단맛도 확 줄고 딱딱해서 먹기도 힘들다. 경상도 말로 파이다.) 따는 타이밍이 아주 중요하다. 수염이 검실검실하면서도 옥수수를 감싸고 있는 푸른빛은 생생할 때 따는 게 좋다.마침 이때다 싶은 옥수수가 제법이라 끊어 담고, 씨 하려고 남겨 둔 것들도 따 왔다. 그리고는 다른 일 제껴 두고 옥수수 찔 채비부터 했다. 제 아무리 마침 좋게 익은 옥수수라 하여도 바로 쪄 먹지 않으면
'손님이여 오라!'해마다 여름이면 나는 각오부터 단단히 한다. 남들에겐 여름휴가철이 나한테는 손님맞이철이기 때문이다. 꾀죄죄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은 대체로 성격이 무던한 경우가 많으므로 크게 걱정은 안 하지만 그래도 식구끼리 있을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올해는 고등학교 때 나와 무려 3년을 같은 반 단짝으로 지낸 친구가 내려왔다. 8살, 6살, 3살 세 아이와 함께 말이다. 간간이 전화통화만 하며 지내고 내가 어쩌다 친정에 가면 잠깐 얼굴이나 보는 정도였는데, 이번엔 장장 7박8일을 내리 함께
쥐, 달팽이, 방아깨비, 병아리, 파리, 그리고....도 친구?아침에 눈을 떴는데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던 다울이가 그런다."엄마, 기쁜 소식이야. 우리 집에 쥐가 살아.""뭐, 뭐, 쥐?"나는 벌떡 일어나 모기장을 헤치고 부엌으로 나갔다."진짜야? 어디 있어?""냉장고 뒤쪽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엄청 통통하고 귀엽게 생겼어."뭣이라? 귀엽다고?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쥐가 귀엽다니 말이 되느냐는 말이다. 다울이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이 나에겐 너무나 끔찍한 소식이었기에 밖에서 일하고 들어오던 신랑에게 비상
지난해 가을, 예상치 못한 이웃이 나타났다. 그것도 다랑이 다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둘 있는 집, 심지어 그 집 막둥이 이름이 다울이란다. 그 이름도 정다운 정다울! 그리하여 우리 마을 5총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나이 순으로 정리하자면 11살 박다울(남), 7살 박다랑(남), 6살 정겨울(남), 4살 박다나(여)와 정다울(여)!나도 지난날을 떠올려 보면 집 가까이 사는 절친이 없던 날과 있던 날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2차원 평면이 4차원 홀로그램으로 확 뒤바뀌는 정도의 차이랄까? 그와 같은 차이와 변화가 우리 마을 5총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2박3일로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은 구례에 있는 태극권 사부님 차밭에 가서 차 따는 거 도와드리는 시늉을 하고, 둘째 날은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고, 마지막 날 오후 느지막이 집에 도착. 얼마나 고단했는지 아이들은 차 안에서 골아떨어졌는데 다랑이와 다나는 그대로 이튿날 아침까지 잠을 잤다.그리고 다음날, 다랑이는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침부터 어디 가냐 물었더니 자기 밭에 심어 놓은 것들이 그동안 무사한지, 닭장에 알은 있는지 보러 간다는 거였다. 조금 뒤 연달아 들려오는 다랑이의
"폴폴폴 봄바람 냄새가 나서나는 갈았지, 조그만 땅을."내가 좋아하는 책 "그림책의 힘"에 소개된 "쑥쑥쑥"이란 책의 한 구절이다. (아쉽게도 "쑥쑥쑥"은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되지는 않았다. 책에 소개된 몇 구절과 삽화 한 장면으로 느낌과 분위기를 짐작해 볼 뿐이다.) 이 구절을 만난 게 벌써 10년도 전인 것 같은데, 이 한 구절을 만났을 때의 가슴 벅참은 여전하다. 뭐랄까, 꿈틀거리는 경작 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몸속 깊이 새겨져 있어 몸과 마음이 절로 기억하고 있는 어떤 움직임을 톡 건드려 주는 느낌이다. 내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배고파'를 외치던 다울이가 요샌 조용하다. 일어나자마자 후딱 옷부터 갈아입고 밖으로 튀어 나가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딜 다니러 갔는지 아침 먹자고 불러도 대답이 없고, 한참 뒤에야 바지가 다 젖은 채로 나타나 빙긋이 웃는다."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거야?""신선못 공사 현장에 다녀왔어요. 어제까지 둑을 새로 만들었는데 밤에 비가 와서 둑이 잠겼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손을 봤더니 진짜 멋져요. 엄마도 한번 가 볼래요?"(얼마 전부터 다울이는 나와 신랑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다. 사연이 있지만
새봄이 되고 나서 다나와 내가 자주 나누는 대화."엄마, 나 많이 컸어?""응, 진짜 많이 컸지. 다나 이제 혼자서 쉬도 할 수 있잖아. 밭도 안 밟고, 복실이 물도 주고, 혼자 옷도 잘 입지?""맞아, 나 많이 컸어. 다랭이 오빠랑 다울이 오빠도 컸어?""그럼, 오빠들도 많이 컸지. 날마다 쑥쑥 키도 크고 으랏차차 힘도 세졌어.""다나도 힘 세졌는데...."그러고는 나를 들어 올리겠다고 끙끙 힘을 쓴다. 내가 애써서 들리는 시늉을 하면 다나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나를 진짜로 번쩍 들어 올
우리 집에 이 시대 마지막 간 큰 남자가 살고 있다. 쉽게 눈치를 챘을 테지만 바로 다울 아빠! 평일에는 회사 가서 돈 벌어 오고 주말에는 애들하고 놀아 주고.... 그런 평범하고 자상한 아빠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생활을 하고 있다. 그저 자기 소신대로 (돈벌이 전혀 안 되는) 농사 짓기, 그거 하나만 한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컴퓨터를 손에 쥔 채 혼자 노는 걸 좋아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고.... 오죽하면 내가 "저 사람은 뒷짐 지고 애 셋을 키우는 것 같다"며 하소연을 늘어놓을까
처음 귀농하던 해(당시 스물아홉) 여름에 친구들과 제주 순례를 했다. 해군 기지가 들어선다 어쩐다 시끄럽던 시기에 제주가 생명평화의 땅으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떠난 길이었다. 십년도 훌쩍 지난 일이라 어느덧 꿈에서나 겪은 일처럼 아득하지만 아직도 어슴푸레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마법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던 어느 곶자왈 풍경, 비 오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아이들, 한국 전쟁과 4.3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동굴을 랜턴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며 걷던 기억.... 그때 나는 아름다운 것이 얼
결혼한 뒤로 명절을 보낼 때마다 가장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시간이 있으니 바로 신랑의 친척들을 만나는 거다. 성묘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큰 고모 댁, 작은 고모 댁, 작은 아버님 댁, 이모님 댁까지... 들러야 할 집이 네 곳인데 그곳에 가면 자녀 분들이 모여 있고 대개는 한두 번 본 얼굴 또는 아예 처음 보는 얼굴인 경우도 많아서 대면하게 되면 뻘쭘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만나면 꼭 한 번씩 듣는 질문과 걱정들(그 산골짝서 뭐해 먹고 사냐, 애들 크는데 돈 벌 궁리는 안 하냐, 얼굴이 그게 뭐냐, 애들이 잘 못 먹어서 그런지 째깐
지난해 11월 26일 보들이가 죽었다. 보들이로 말할 것 같으면 강아지 때부터 5년 가까이 키운 우리 집 개. 그동안 아픈 적 한 번 없이 묵묵하게 마당 한구석을 지키며 든든한 배경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먼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많이 그리웠노라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던 그 모습, 멧돼지를 쫓으라고 논에 묶어 놓았을 때 우리가 위문차 논에 찾아가면 먼 발치에서부터 짖고 날뛰며 우릴 환영하던 그 모습.... 이제는 아득해져 꿈처럼 느껴지지만 한때는 그것이 현실이었다. 보들이는 늘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그랬던 보들이
누구나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어둠의 구덩이 속에 빠져 넘어지거나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가도(또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자칫 방심하면 구덩이 속 어둠이 나를 사로잡는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정말 잘 하고 있는 게 맞나? 갑자기 모든 것이 어그러져 있는 것 같고, 마음도 따라 쪼그라든다. 한 걸음 내딛을 힘조차 없어서 그냥 주저앉아 엉엉 울고만 싶은 기분.... 느껴 본 적 있으신지?나는 이게 어른들만 느끼고 겪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이들도 똑같다는 것을 다울이를 통해 배웠다. 워낙
동네 할머니가 양파 모종 남은 걸 주셨다. 모종을 비닐에 싸 놔서 많이 물캐졌다며(짓무른 상태라며) 오늘 내로 빨리 심으란다. 알겠다고 대답을 해 놓고 밭부터 만들려 하니 일단 다나를 떨어뜨려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자기도 하겠다고 나서서 양파 모종을 갈기갈기 찢으며 놀 게 불 보듯 훤한 일이니까. 해서 요즘 우리 집 아이들이 홀딱 빠져 있는 '알프스 소녀 하이디' 동영상을 틀어 주고 25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자, 25분 안에 어떻게든 해 보자!오랜만에 괭이와 호미를 잡으니 어깨 죽지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듯 신이
"엄마, 가을은 언제 끝나? 빨리 겨울이 오면 좋겠다."다울이가 이토록 겨울을 기다리는 까닭은 뭘까? 바로 일하는 게 힘들어서다. 한동안(요 며칠은 더욱) 가을걷이 정점에 다다라 다울이까지 최전선에서 활약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게 아주 죽을 맛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책을 얼른 읽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데 다울이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울 아빠가 쉴 틈 없이 다울이를 불러 대니 말이다."다울아, 고구마 손질해라!""다 했으면 울타리콩 따서 까라.""다울아, 땅콩 따자!""이리 와서 완두콩 심어라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추워져서 불 때는 게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밤에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잔다. 오늘 아침엔 글쎄 집 안에서도 입김이 나오지 뭔가. 모기에 시달리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서 날이 추워지기만을 바랐는데 막상 덜컥 추워지니 짧은 가을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이들도 아침이면 춥다며 얼마나 호들갑을 떠는지.... 내가 아직도 옷 정리를 못한 터라 서랍엔 긴팔 옷보다 반팔 옷이 많아서 아침마다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리고는 한다."엄마, 옷 정리한다고 하고 아직도 안 했지? 긴바지가 얇은 거밖에 없잖아.""맞아, 나도 너무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하루 일과에서 나들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간혹 집 안팎의 일감이 넘쳐나 나들이를 포기할라치면 아이들 사이 관계가 삐그덕거리거나 내 몸이 삐그덕거리거나 둘 중 하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지간하면 다랑이 다나 낮잠 자고 일어나서 곧장 나들이 갈 채비를 한다. 봄에는 봄나물, 여름에는 나무 열매나 다슬기 하는 식으로 계절에 따라 나들이 주제가 달라지고는 하는데 요즘 같은 계절에는? 당연히 도토리와 밤이 주제가 된다."얘들아, 도토리 주우러 나들이 갈까?""엄마, 도롱구테로 가자. 내가 아까 자전
6년쯤 전(다울이가 네 살쯤 되었을 때), 밖에서 우당탕퉁탕 꺄아옹꺄아아악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닥닥 밖으로 나가 보니 고양이들이 패싸움을 벌였던 모양이다. 내가 문 열고 나가는 소리에 놀라 몇 마리는 달아나고 한 마리만 남아 있었는데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눈이 찌그러져 있고 눈가에 피도 났다.) 뭘 어떻게 해 줘야 하나 걱정하며 쳐다보고 있으니 그 고양이도 내 눈치를 살피는 듯 잠자코 있다가 마침내 내가 다가가자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몹시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을 안고 집 안으로 돌아왔는데 다울이는 충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