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루카의 복음을 계속 읽고 있다. 지난 주일부터 시작하여, 복음은 루카가 예수님이 종교정치 권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제자의 자유우리는 루카 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제자 열두 명을 사명과 연계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은 그분의 사명을 신비스러운 72명의 제자들과 나누고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적으나, 숫자를 넘어(의심할 바 없이 상징적 숫자) 그들의 존재 자체는 주님의 메시지가 충실함을 요구하기 시작하
오늘 세 가지 독서의 공통 주제는 분명히 제자됨과 예수님을 따름이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사명과 살아야 할 생활방식이 내포된다.세 제자들루카는 예수님과 세 사람들의 만남을 이야기하는데, 중대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갈 구체적 가능성을 보여 주며 말한다. 중대한 상황이란 “그들이 길을 따라 가고 있을 때”(루카 9,57)이며,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예수님은 이미 확실하게 아버지께로 가는 여정에 충실히 살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동시에 주님의 죽음과 생명을 표현하기도 한다.그들이 배부를 때까지제자들이 사명에서 돌아올 때에, 예수님은 벳사이다에서 그들과 따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루카 9,10) 아마도 이런 일은 후에는 가능할지 몰라도(9,18-22) 지금은 “군중들”이 그분을 따라오기 때문에(9,11) 허락되지 않는다. 계획이 틀어졌어도, 주님은 그들을 맞이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그들에게 메시지의 핵심을 선언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그분은 군중들이 당시 경험하고 있던 것과 매우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
우리는 방금, 그리스도교 대축일 가운데 하나인 성령 강림 대축일을 기념했다. 성령의 힘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한가운데에 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성령의 현존의 중요성에 깊이 잠겨 보라고 초대한다.모든 진리 안으로요한의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고별 담화로부터 온다. 고별담화의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인도해 주고 주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해 주는 하느님의 숨길, 성령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와 아버지의 사랑을 선언하신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생명이고, 이 생명은 모든 형식과 법규를 초월한다. 메시지의 요
성령 강림절에, 우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교회 안에 현존하는 성령을 기념한다.평화와 용서예수님의 죽음, 십자가 위의 처형은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 공포를 일으킨다. 모든 복음서들은 이 사건들 뒤 나타난 두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네 복음 모두, 특히 요한 복음서가 우리에게 두려움은 믿음의 반대라고 말한다. 믿음을 갖는 것은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요한은 제자들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대신, 한 집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말한다.(요한 20,19) 그러자 주님이 나타나 그들에게 평화, 다시 말하자면 생명, 건강,
부활시기가 끝나가고 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여러 번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반복하여 들었다. 즉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메시지다. 그분은 죽음을 정복하고 죽음이 가져오는 것들도 이겼다. 이것이 우리 희망의 원천이다.(에페 1,18)주님의 살아 계심을 증언하는 사람들마태오와 마르코의 복음들은 사명에 파견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제자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기쁜 소식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들의 만남을 증언하는 것으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새로운 빛으로
우리들은 부활 주기의 결론에 그리고 예수님 승천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처럼, 이번 일요일의 독서들은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을 기념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간다.예수님은 길이다요한 사도가 말하듯이,(요한 14,23)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사랑을 증거하고 참다운 제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것은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하느님께 가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요한 복음의 주요 주제들 중의 하나다. 즉 예수님은 말씀이요, 아들이며, 우리 인간 역사
부활시기 동안 내내 우리는 생명을 기념한다. 생명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요즈음의 주일날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 복음서는 생명과 사랑이라는 두 주제들을 연결시킨다. 우리는 “믿음의 문”(사도 14,27)을 통하여 이 관계를 들어간다.주님을 현존케 하면서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분의 가르침의 요약을 그들에게 남긴다고 말한다. 주님은 곧 떠나갈 것이고, 그분은 추종자들이 직면하게 될 도전들에 관하여 의논을 즉시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이 그분에게서 받은 “새로운 계명”, 즉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부활의 주기는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 우리의 결단을 보강시켜 주는 복음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목자의 소리요한 복음은 방금 예수님을 자기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로 제시한다. 오늘의 구절은 말할 나위가 없고, 착한 목자 부분의 배경도 유대 백성의 지도자들과의 갈등이다. 갈등 바로 전에, 예수님은 말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 10,14) 이제 그분은 양들이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들은 그분을 따른다고 말한다.(10,27) 예수님과 제자들 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다. 이 생명의 증언은 어려운 대면으로 이끌지도 모른다.와서 먹어라요한 복음서는 이미 부활한 예수님의 두 가지 출현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리고 두 번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걸고 그 안에 숨어 있었던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자들이 일상 하던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난다. 나타날 때마다, 요한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곳에 계신다; 그분의 몸
이번 주일에, 우리는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 진복을 선포하게 된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왜냐하면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생명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을 통하여 여러분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생명을 일으키는 일로 변화된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부활은 어떤 증거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출현은 천천히 제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믿음은 제자들 가운데에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에 우리 마음을 들어 올리도록 해
모든 인간의 고통 앞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이 우리가 외치는 기쁨의 소리를 목구멍에서 죄이는 것 같은 상황 앞에서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기념할 수 있을 것인가?여인들, 처음에 도착한 사람들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모여서 밤새 잠들지 않고 깨어 있곤 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했고 새벽녘에는 죽음을 정복한 그분의 승리를 기념했다. 부활성야가 그들에게 전부였다. 후에 부활성야 예식이 갈라지고 다른 요소들이 덧붙여지면서 점차 현재 우리가 지내는 성주간이 되었다. 과월-죽음으로부터 생명으
군중은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을 환영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곧 주님은 죽음의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뒤를 돌아보지 않기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들은 복음서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고 부활의 빛으로 조명하며 읽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하여 분명한 말로 이야기해 주는 루카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분의 땀은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우리는 이 부분을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으며 또한 아버지의 뜻에 그분이 따르고 있다는(23,46) 느낌 없이 읽을 수
사랑이 없다면, 용서도 없다. 화해는 죄인의 굴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만남의 결과다.불일치에 대한 비난죄를 지은 사람 앞에서 그것도 여성 앞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전혀 새로운 태도가 오늘 복음의 절정이다. 간음을 저질렀을 때 여성의 경우 율법은 죽음을 선고했다. 주님께 문제를 들고 온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예수님이 실수하면 고소할 생각이었다.(요한 8,4-6)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 신비스럽게 쓰기 시작함으로써 비난자들을 비난받는 사람들로 만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사순시기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기념제가 기쁨과 또한 용서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한다.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보통 때처럼, 바리사이들과 율법자들은 여전히 경계하고 조심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공적으로 죄인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소외시키고 경멸하는 사람들을 환영했다고 비난한다.(루카 15,1) 이것이 계기가 되어 루카는 주님의 태도에 있는 동기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비유 세 가지를 전해준다. 마지막 두 비유는 루카 복음서에만 있다. 오늘 우리가 읽는 것은 세 번째 비유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사순시기는 보통 참회의 시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죄와 그 결과에 대한 편협하고도 억압적인 관점에서 해방되도록 해 준다.죄를 짓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루카 복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의 사건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건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화는 그분의 백성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과 그분의 가르침이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연관되는지 우리가 보도록 해 준다. 기쁜 소식을 선언한다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민감하게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느님나라는 역사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사순시기는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시기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장면은 부활로 가는 길에 있어 절정인 것같이 보인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탈출 루카의 복음 구절의 배경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의 배경과 똑같다. 바오로에 따르면,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갈라 2,9)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반한다. 베드로, 요한 그리고 야고보가 그들이다.(루카 9,28)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루카는 그들이 예수님의 “떠
사순시기는 역동적인 시기다. 교회의 전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도록 이끄는 복음 말씀을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성령으로 가득 차” 예수님은 광야로 가시는데, 루카는 이 구절에서 그가 즐겨 붙잡는 주제들 중의 하나인 성령의 권능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루카 3,22; 4,1; 4,18)는 주제를 다시 떠올린다. 성서에 보면, 광야란 우리 자신과 만나는 전통적 자리이고 우리가 시험에 처하는 장소다.(신명 8,1-4) 40여년 동안 유대 백성은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갔다.(광야에
루카의 평지설교와 마태오의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장차 다른 이들의 안내자요 교사가 될 제자들의 좋은 양성에 관심이 많은 스승으로 제시된다.생명의 열매 혹은 죽음의 열매예수님의 제자들의 역할(기능)은 그들 자신의 양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인도하고 지도해야 한다. 제자들은 파견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이 증언하는 신앙에 따라 또한 그들 자신의 삶에서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는 증인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의 총체적인 일관성에 관심을 둔다. 보지 못하는 사람은 또 다른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인도할
이번 주일 루카 복음 역시 평지설교에 속한다. 루카의 참행복들은 역사의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을 보여 준다. 이 거룩한 사랑은 오늘의 복음 구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의 뿌리다. 예수님은 그분 앞에 모여 있는 군중에게,(루카 6,17.27) 아버지 하느님처럼 이기심을 버리고 사랑하라는 초대를 한다.그분은 가장 어렵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는 문제다.(6,27.35)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다. 이 적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