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단지 형제자매일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가 되어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 되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영적인 삶이 단
아기가 태어났다베들레헴이라 불리는 유다지역의 한 고을에서 호적등록을 하러 온 요셉과 그의 약혼자 마리아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어제 저녁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 오래된 탄생 이후에 해마다 동지 다음날 아침인 12월 25일은 그 아기가 탄생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로 지구촌이 떠들썩하다. 왜냐하면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 죽은 이후에 비로
지금까지 우리는 한분 예수님으로 부터 4개의 다른 복음서가 기록되어 나온 배경의 일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어떻게 전해져 왔는가를 보았다. 이번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고 전했는지를 살펴본다. 우선 제자들의 복음 이해를 살펴보고 팔레스티나에 있던 초기 공동체 및 팔레스티나 밖의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한 아기의 탄생을 기념하는 밤입니다. 어두운 우리의 삶에 빛으로 오신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어둠을 먼저 체험하고 빛을 밝혔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복음은 요셉이라는 사람과 그 아내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났고,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황제
유다와 베드로는 절망 속에서 예수로부터 도망가거나 희망으로 그분에게 돌아가는 모습들 사이의 선택을 나에게 제기한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고 목을 맸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그분에게 돌아갔다. 때때로 절망은 모든 문제를 부정적으로 해결하는 매력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절망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속 다시 죄를 짓고
나의 신앙의 핵심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라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거대한 영적 과제들 중의 하나는 이 확신을 선포하고 이 지식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제는 쉽지 않습니다. 실상, 우리들 대부분은 진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진리를 주장하는데 늘상 실패합니다. 당신과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
대림촛불 기도- 박춘식 온 세상이 짙은 어둠에 눌려 있습니다 암흑의 벽을 더듬거리는 저에게 빛살 한 가닥 주소서, 대림촛불 하나로 제가 지은 죄, 하 많은 죄가 망각의 어두운 휘장에 가리어져서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이 우둔함을 깨우쳐 주소서, 두 개의 촛불로 사막 순례자 되어 따가운 모래 언덕 검불 위에 가칠가칠 꿇어앉아 참회하면서 줄곧 구
매우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것을 무슨 덕처럼 여겨왔다. 나는 자만심과 과대평가에 대해 자주 경고를 받아와서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진짜 죄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첫째 사랑을 부인하고 나의 본래의 선함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느님의 첫째 사랑과 나 자신의 본연의 선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사랑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전적인 자유의지로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처음에 이 사실을 접하면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지만, 더 깊이 이 생각에 대해 성찰해 보면 당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신비스러운 성소는 고독을 제공하는 것이다. 고독은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서로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절대로 성령을 억누르려고 하지 말라”고 바오로사도는 말한다. 고독 속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그분 모습을 드러내고,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늘 기뻐하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
나는 모든 창조가 우리의 외로움과 어느 정도 맞닿는 것을 요구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외로움과 직면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자기 표현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된다. 글을 써야 할 때 그래서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보게 될 때에, 나는 나 자신의 글을 종이에 쓰기 전에 또 다른 책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의자를 꽉 붙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첨가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제 대화를 녹취하여 기록
자연을 거니는 것, 예수기도 같은 짧은 기도를 반복하는 것, 간단한 노래, 어떤 움직임이나 자세들,이런 것들과 수많은 작은 것들이 고독을 훈련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형태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지, 또한 충실하게 계속 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가끔씩 한 시간을 채우며 하는 것보다 매일 10분간 고독의 시간을
고독은 함께 하는 시간과 대조되는 사적인 시간이 아니다. 고독은 우리의 피곤한 정신을 회복하는 때도 아니다. 고독은 공동체 생활의 무슨 중간휴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독은 공동체가 성장하는 기반이다. 혼자 기도하고 공부하고 책을 읽거나 쓰고 매일 직접 사람들과 관계를 맺던 자리를 떠나 그냥 조용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 깊은 친밀함 속
죄송합니다- 정호승 아직 숟가락을 들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도대체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해는 지는데 숟가락을 들고 하루종일 지하철을 헤매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살얼음 낀 한강에 떠다니는 청둥오리들 우두커니 바라보아서 죄송합니다 한강대교 위에서 하늘로 힘껏 던진 돌멩이들 별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그분의 신발에 입
고독은 변화의 용광로이다. 고독 없이 우리는 우리 사회의 희생자로 남아있고 가짜 자아의 환영 속에 계속 빠져 있게 된다. 예수 자신도 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갔다. 용광로 속에서 그분은 세상의 세 가지 욕망과 대면하게 된다. 인기(“돌을 빵으로 만들라”), 명성(“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권력(“이
우리는 말이 값싼 취급을 받는 세계에 살고 있다. 말은 우리를 집어삼킨다. 광고, 교통신호판, 팜플렛, 책, 칠판, 화면, 신문 등. 말들은 움직이고 나불거리며, 회전하고 더 커지고 더 번쩍이고 더 뚱뚱해진다. 말은 우리에게 온갖 크기와 색깔로 다가온다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말은 그냥 말일 뿐이야.” 말의 숫자
친구들과 침묵하는 것이 그들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에게 계속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주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나에게 준다.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나누는 것은 자주 가까움 보다 거리를 더 만들어준다. 말들은 마음을 한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있었고, 요한이 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
티토스 원장이 말했다, “순례란 우리의 혀를 다스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례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침묵이 미래 세계에 대한 최상의 예견이라는 사막의 교부들의 확신을 말해준다. 침묵에 관한 가장 빈번한 논쟁은 말이 단지 죄로 이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