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은 히브리인 떠돌뱅이 집시들의 노래다. 사막의 여행자 예수도 시편에 담긴 시를 낭송하길 즐겨하였다. 시편은 가난뱅이 밑바닥 민중들이 바치는 소원들이 낱낱 샅샅 적힌 시집 한권 분량이다. 남루한 처지를 비관하여 시종일관 음울하거나 절절한 것은 아니다. 보라! 사랑에 빠진 연인의 입술처럼 달디 단 꿀이 행간마다 묻어나 있다. 정의의 노래란 고통어린 삶을 견
기념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쉽사리 행복하고 즐거우며, 기쁜 순간들을 떠올리고 잠시동안이라도 고된 삶의 순간들을 잊어버리고 음악, 춤, 음료수, 웃음 그리고 수많은 다정한 대화 속에 빠져 버리는 때를 연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기념이란 이런 것들과 거의 상관이 없다. 기념은 삶과 죽음이 결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때에
사랑, 목걸이 하자- 박춘식 주머니에 지갑 안에 넣지 말고 장롱이나 베갯맡에 두지 말자 사랑을 책갈피에 끼우지 말고 목에 걸고 다니자 바라보면 반짝이는 별이 되고 포옹하면 불꽃으로 피어나는 이중주 선율에 드맑은 사랑을 목에 걸고 다니자 마음을 하나로 포갬포갬 하여 천지인의 하모니를 보여주고 하느님의 향기를 나누어주는 사랑, 목걸이 하자
감사란 삶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선물로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가장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감사란 삶의 모든 것을 포옹하는 것이다. 좋은 것, 나쁜 것, 즐거운 것, 고통스러운 것, 거룩한 것 그리고 그다지 거룩하지 않은 것 등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애도, 평화와 갈등이 철저하게 갈라져 있는 사회에서 그것
자기확인과 자기비움은 반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그가 갖지 않은 것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 수 없을 때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을 사랑 안에서 포기 할 수 없다. 아무도 자신의 신원을 발견하지 않고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예수는 30년을 소박한 가족 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예수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길 원하는지 알고 있
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신원(身元)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
만일 우리에게 끼어드는 간섭들이 실상은 기회라고 한다면 어쩔 것인가? 만일 그런 방해들이 성장이 일어나고 그 성장을 통하여 우리가 충만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어떤 내적인 응답을 요구하는 도전이라면? 우리 역사의 사건들이 옹기쟁이가 진흙을 빚는 것처럼 우리를 빚어내고 있으며, 이 빚는 손에 우리자신을 조심스럽게 내어맡김으로써 우리의 참다운 소명을 발견하고 성
겨울 그리스도-김남조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흰 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유리와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냉기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올리시는 설
우리 삶에 나타나는 수많은 모순들,집에 있으면서도 집이 없다고 느끼는 것, 지루해하면서 바쁜 것, 외로움을 느끼면서 인기 있는 것, 많은 회의를 느끼지만 믿는 것 등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화나게 하며 위축시킬 수도 있다. 이런 모순들은 우리 앞에 열리는 모든 문에 우리가 결코 온전히 현존할 수 없다고 느끼도록 만들며 수많은 다른 문들이 닫
마태오에 의한 복음서는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태오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또한 이 복음서의 저자가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2세기말경부터 사도 마태오가 이 복음서의 저자라는 전승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관상적인 삶은 우리가 시간과 맺는 관계에 있어 지속적으로 불투명함에서 투명함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한다. 시간은 끊임없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되려고 위협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우리를 속박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인 것 같을 때가 자주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했으면 하지만, 시간이 없다. 오늘 해야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분의 삶 안에 그분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
예수는 충만한 때에 왔다. 그분은 다시 충만한 때에 올 것이다. 예수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그리스도가 있고, 시간은 충만해진다. 우리는 자주 시간이 비었다는 것을 체험한다. 우리는 내일, 다음주, 다음달 혹은 다음 해에 의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때때로 시간의 충만함도 경험한다. 그것은 시간이 그대로 정지해 있는 것같이 보일 때이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실을 확신할 때마다 우리의 삶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사랑받는 존재로서 우리의 삶은 우리의 탄생과 죽음 그 테두리를 훨씬 넘어선다. 출생할 때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죽을 때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받음은 영원한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나는 너를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으로
스스로 묻는다- 박춘식 내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 어디서 길이 시작되는지 여정(旅程)의 끝은 어딘지 생각해 보았는가 지금 가고 있는 길목에서 풀꽃이 반겨줄까 그러고 또 이 천 년 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물어보았는데 나는 참나무 낙타 장승 강물 바위에게 진리를 물어보았는가, 눈동자 뜨겁도록 찾아보았는가 생명의 소리를 들어 보았는지 성
저자 최근까지 마르꼬에 의한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르꼬는 베드로의 동반자로서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과 행적을 적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복음서의 내재적 형태나 포함하고 있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서의 저자는 단순히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해 나갔다고
오늘 오후 3시경, 내 여동생이 네덜란드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내 제수가 딸을 낳았는데 다운증을 갖고 태어났다는 소식이었다. 한 주 전에 나는 피트 러기르의 이웃사람 집에서 본 어느 다운증 아이에 대하여 글을 썼다. 또 어제는 월 스트리트 져널지에서 그 아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오늘 나는 똑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조카를 보고 있다. 나는 네덜란드
장애인들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낸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준 것보다 우리가 받은 것이 더 많다고 기꺼이 말 할 것이다. 때로는 장애인들과 함께 일함으로써 참다운 그들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까지 고백할 것이다. 쟝 바니에는 이런 깨달음을 아름답게 상징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수년전, 라르슈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지로 순례를 떠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들의 고통을 잘 요약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상실”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는다! 때때로 삶은 그냥 상실들의 긴 연속물 처럼 보일 때도 있다. 태어날 때 우리는 안전한 움을 잃고, 학교에 가면 가족생활의 안전함을 잃고, 첫 번째 직장을 얻게 되면 청년의 자유를 잃어버린다. 결혼하거나 서품을 받으면 많은
당신의 고통은 깊고 어떤 특정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추상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당신은 괴로워한다. 거부, 버림받음 그리고 쓸모 없음의 감정들이 가장 구체적인 사건들 속에 뿌리박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고통은 고유하다. 특히 예수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면 가장 선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