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하느님과 모든 인류를 보는 것이다. 이 신비는 나에게 예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일으킨다. 수세기 동안 셀 수 없는 이미지들이 예수의 얼굴을 그리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어떤 것들은 나에게 예수의 얼굴을 보도록 도와주었고 또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안드레아 루블레브가 그린 그리스도의 이콘을 보았을 때 나는 결코
점차적으로 나는 기도생활에서 새로운 차원을 깨달아가고 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혼란, 두려움, 유혹 그리고 내적인 혼동 가운데 존재하는 하느님, 마리아, 천사들과 성인들이 나를 보호하며 현존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내 기도는 전혀 집중적이거나 심오하지 않지만, 이번 주간에 기도하는 시간을 참으로 갖고 싶은 갈망이 떠올랐다. 나는 빈센트 수녀
겸손을 구하는 기도- 박춘식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주님 *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길 때 먼저 겸손을 두 손으로 꼭 잡게 하소서 칭찬이나 사랑 받기를 원하고 있을 때 겸손을 더 원한다고 말하게 하소서 기쁜 일이나 도움을 바라고 있을 때 겸손을 간절히 바란다고 생각하게 하소서 충고 비판 욕설을 피하려고
믿음은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어느 순간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믿음은 내 맘대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요 은총이다. 인간의 내면은 셀 수 없이 많은 관계망 속에서 여러 후천적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다. 단순히 내가 만들어 내
우리가 우리자신을 예수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해도, 자주 세상이 우리에게 내 놓는 두려운 질문들 때문에 위축된다. 우리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불안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생존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힌 걱정하는 사람들이 된다. 우리 자신의 생존, 우리 가족, 친구들, 동료들의 생존, 우리교회, 우리나라, 우리세계의 생존을 걱정한다. 이런 두려운 생존의 질문들이 우리
참으로 기쁜 소식은 하느님이 멀리 있는 하느님이 아니며, 두려워하거나 피해야할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 때문에 아파하는 하느님이고 인간 투쟁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은 연민의 하느님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이 되기로 선택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
1948년 제국의 등에 업힌 시오니스트들이 유대 땅에 속속 입성한다. 유대 땅에 잔류를 결심한 26만 명의 아랍 사람들(대부분 농부)은 그날로 제2, 제3의 히브리 민중이 되었다. 구약의 하느님을 유태인의 민족 신, 부족 신으로 보는 눈은 하느님을 한참 잘못 이해한 엉터리 시각이다. 하느님은 온세계 모든 가난한 자의 하느님, 억눌린 자의 하느님, 남몰래 눈
예수는 우리가 그분처럼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처럼 되었다. 그분은 하느님과의 동질성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을 비워 우리처럼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처럼 되고 그분의 거룩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삶의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는 성령의 작업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몸으로서 있는 한, 그들은
‘믿음’ 하면 ‘종교’를 연상하곤 하지만, ‘믿음’은 인간 관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 만한 불행과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내가 너를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lsq
십자가 길 1 -박춘식 오만 가지 죄들이 올라갑니다 칼 창 방패 로마의 힘이 번쩍거립니다 죄 없는 청년이 피범벅 되어 올라갑니다 수많은 죄인이 뒤따라 갑니다 십자가 나무가 십자가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큰 쇠못과 굵다란 노끈이 올라갑니다 망치도 사닥다리도 나무토막들도 올라갑니다 모두 해골산으로 올라갑니다 교만이 목을 뻣뻣하게 세워 올라가고 시기 질투 증오도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가장 기뻐하는 아들이다”(마태오 3,17). 이 말들은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예수의 참다운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나는 예수가 세례받을 때 들었던 이 말들이 또한 나에게 말해졌고 예수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말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1. 개 요 저 자 오랜 전승에 의하면 네번째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중 하나였던 제베데오의 아들 요한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한다. 이를 첫번째로 언급한 이는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였는데 그는 180년경에 유명한 주교였었다. 이레네오의 이 언급은 그럴듯 하기는 하지만 이 언급이 사실인지에 대한 확인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언급을 확인할 수
우리의 삶은 예수의 삶이 되라는 운명을 받았다. 예수의 사명이 가지는 전체 목표는 우리를 그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생명과 친밀함을 가지도록 우리를 이끌기 위하여 왔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예수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려고 한
과거에 나는 감사함이 받은 선물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응답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감사함이 또한 훈련을 통하여 살아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감사의 훈련은 나의 존재 전체 그리고 가진 것 모두가 사랑에서 온 선물로, 그래서 기쁘게 기념하고 축하해야 할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려는 확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훈련으로서의 감사는 의식
감사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부터 나온 거룩한 선물이며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가 감사하고 다른 이들과 그것을 나눈다는 깨달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를 창조하고 건재하게 하며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을 더 만날수록, 우리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수많은 열매들을 알아보게 된다. 그것들은 성령의 열매이며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즐거움, 평화
2011년에 게재했던 을 새롭게 수정해서 다시 게재합니다. 스크랩해서 사용하셔도 되고, 인터넷상에서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남은 사순시기 동안 매처 마다 읽고 묵상한 내용을 간단하게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우리 자신의 삶을 견주어 봅시다. -편집자 십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하여 실제로 감사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그냥 받아들이거나 잊어버리려고 애쓸 따름이다.” 이 말들이 표현하고 있는 태도는 우리들이 자주 과거를 감사하며 기억해야 할 좋은 것들과 받아들이거나 잊어야 할 고통스러운 것들로 분리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이런 분리를 하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로 나가셨다고 말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신앙 초기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각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분이 당신 생애의 어느 시기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셨다는 말은 그분이 그 때부터 하느님에 대한 깊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 축일을 앞두고 사흘을 단식과 기도와 자선을 실천하며 특별하게 보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실천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이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자, 교회는 이 사흘의 실천을 40일로 늘렸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사순(四旬) 시기입니다. 그들이 40일을 택한 것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봄길-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흘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