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새로운 성인들, 몰아지경에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나 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새로운 국제질서를 자유롭게 구상한다. 그 질서 안에서는 정의가 다스리고, 전쟁이 더 이상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선호적 방법이 되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비전을 일별할 수 있다. 쟝 바니에가 20년전 두 명의 장애인들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비일, 곧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이 점에 있어 마르코 수난사와 요한 수난사의 기록이 온전히 일치한다. 마르코는 예수의 장례 일시를 다음과 같이 명기했다. “이미 저녁이 되었고 실은 준비일, 즉 안식일 전 날이었다”(마르 15,42). 마르코의 예수 장례기를 보면, 서산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기다리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는 소속감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소원함도 느끼게 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함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충만하게 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돕지만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함께 하는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말고 깊히 사랑하자. 우리는 깊은 사랑이 일으킬 수 있는 고통에 대해 두려워할지 모른다. 당신이 깊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거부하고 떠나며 혹은 죽을 때 당신의 마음은 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때문에 깊히 사랑하는 것을 유보해서는 안된다. 깊은 사랑에서 오는 고통은 당신의 사랑을 더 결실있게 만들어준다. 마치 쟁기가 땅을 갈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잊고 있다. 우리의 존재를 서로에게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즉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탈렌트들이다. 즉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특히 잘하는 능력들에 대해 떠올린다. 여러분과 나는 이 탈렌트에 관해 자주 말했었다.“우리들의 고유한 탈렌트
오늘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만찬 중에 유언으로 성찬의례를 남기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로 들은 고린토 1서는 그 성찬의례를 소개합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각각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이 잔은 내 피
야훼여! 아뢰옵나니 귀를 기울이소서. 내 한숨짓는 까닭을 알아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느님이여!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모르는 체 마소서. 당신께 기도 드립니다. 야훼여, 당신은 아침 기도를 들어주시기에 이른 아침부터 제물 차려놓고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당신께서 사악을 좋아하실 리 없사오니, 악인을 반기실 리 또한 없으십니다. 거만한
성찬례에서 흘러나오는 움직임은 친교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사명으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이다. 친교, 일치의 체험은 먼저 우리를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 파견하고 그들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사랑의 지체를 세우도록 한다. 그러면 공동체로서의 우리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뻗어나갈 수 있다. 나는 일치에서 사명으로 갈 때 공동체를
하느님의 빵 - 박춘식 아무리 특별한 빵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 빵을 만드는 데 33년이라면 그는 완전히 실성한 사람이다 세상에 어리멍청한 그런 제빵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미치고 안으로 미치고 온통 사랑으로 미친 빵, 밀가루 반죽 30년을 쫀득쫀득 마친 다음 뜨거운 사막 햇살 노릇하게 40일간 구웠다 그리고 3년에 걸쳐 시식과정을 마친 빵, 이
공동체는 마치도 큰 모자이크 같다. 각각의 작은 조각들이 너무나 중요하게 여겨진다. 한 조각은 밝은 적색, 또 다른 조각은 찬 청색 혹은 뿌연 녹색, 또 다른 것은 따스한 자주색, 또 다른 것은 선명한 보라색, 또 다른 것은 빛나는 황금색이다. 어떤 조각들은 특별하게 보이고, 어떤 것들은 평범하다. 어떤 것은 가치있게 보이고, 다른 것들은 별로 가치가 없게
우리들이 겪는 고립의 대부분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가능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으며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이 자기의지는 많은 매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힘을 느끼게 해주고 빨리 움직이게 해주며 우리가 우리자신의 상관이라는 만족감을 주고 많
"저희 본당 신부님의 강론이 마치 저희 두 사람에게 호소하듯 간절합니다." 명문대 출신 신혼부부가 1994년 구정에 세배 와서 한 말이다. 참으로 흐뭇한 증언이다. 불행히도 많은 지성인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이들의 강론 평 네 편을 옮겨 적겠다. 이미 십여 년 전에 C 시인이 쓴 글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옛말을 인용해
오늘 우리는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그 시대 종교 실세로부터 버림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허무로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패배(敗北)였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두 번의 재판을 거칩니다. 유다 최고회의의 심
모든 세대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왜 가능한 한 자연에 가까이 살려고 노력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중세 때의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꼬, 성 부르노 뿐만 아니라 켄터키의 숲속에서 살았던 토마스 머튼 그리고 수도원을 뉴멕시코의 고립된 협곡에 지었던 베네딕도회 수도승들도 그렇게 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시
성찬례의 가장 성스러운 측면들 중 하나는 예수와의 가장 깊은 친교, 일치가 하느님의 부재 속에서 일어난다는 신비다.제자들과 보냈던 시간 내내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는 충만한 친교가 없었다. 그렇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지냈고 그분의 발 밑에 앉았다.그렇다, 그들은 그분의 제자들이며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과 충만한 일치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분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물질적 조건 세 가지를 꼽으라면 누구나 의식주라고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먹거리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기에 예수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했지 옷가지나 집을 청하라고 하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rsquo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종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때의 신심은 말 그대로 ‘믿는 마음’이다. 이때 믿음과 마음의 관계도 중요하다. 어법상으로 믿음은 마음의 수식어처럼 되어 있지만, 정말로 ‘믿는 마음’이라면 그때 믿음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정말 믿는 마음이라면 한쪽에서는 믿
십자가 길 2 - 박춘식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말하는 (요한복음18:36) 예수님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로마 총독이 명령한다 예수를 저 세상 왕으로 등극시켜라 ‥‥ 새 왕국 깃발을 올릴 십자가 깃대를 짊어지신 예수님 너무 무거운 깃대 때문에 넘어지신다 어머니는 치솟는 눈물로 아들 얼굴 닦아주시고 행차를 구경하던 시몬이 깃
성찬례는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일상적이고 또한 가장 거룩한 행위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진실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너무나 거룩하다; 너무나 친숙하지만 또 너무나 신비스럽다; 너무나 가깝지만 너무나 계시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이 예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
어떤 이는 우표를 수집하고 어떤 이는 양초를 수집한다. 또 어떤 이는 찻숟갈을 수집하고 어떤 이는 성냥곽을 수집한다. 요즘 나는 사세구도 모으고 기도문도 모은다. 그렇지만 어떤 기도문이나 막 모으지는 않는다. 되도록 진선미 삼박자를 다 갖춘 기도문, 내용과 구조와 표현이 다 좋은 기도문만 골라 모은다. 그러자니 기도문 수집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인생에 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