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종교에나 반드시 의례가 있다. 무속에는 굿이 있고 불교에는 염불이 있으며 유교에는 관혼상제가 있다. 천주교에도 여러 가지 의례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곱 가지 의례를 가려내어 성사(聖事)라고 한다. 성사는 행위예술 비슷한 것이다. 성사는 마음속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상징행위이다. 그러나 성사에는 신심의
내가 말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을 복음서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예수가 죽음전 날 사도들에게 했던 말이다: “사람이 제 친구들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나에게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교적 직분의 의미를 요약하는 말이다. 만일 가르치기, 설교하기, 개인적인 사목
야훼여! 노여우시더라도 나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나를 벌하지 말아 주소서. 야훼여! 힘이 부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뼈 마디마디 쑤시오니 나를 고쳐 주소서. 내 마음 이토록 떨리는데, 야훼여!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야훼여! 돌아오소서, 이 목숨 구하소서. 당신의 자비로써 살려주소서. 죽으면 당신을 생각할 수 없고 죽음의
사제들과 목사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무슨 특별한 선물을 받는가? 그들은 다른 이들이 보도록 돕기 위하여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그들 존재의 원천에 더 가까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구속되어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싶은 조건들을 더 깊이 알고 있고 느끼며 보고 있는가? 만일 이 질문들에 아니오 라
자주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다. 그러나 교회에 속하지 않으면서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은 더 어려울지 모른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수많은 교계적 일들과 성직자로서 “들락날락” 하는 일에 너무나 사로잡히고 빠져 있어서 더 이상 예수께 집중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가 보게 되는
온갖 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화사함을 뽐내는 봄이다. 봄은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딘 모든 생명에게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교회도 수난과 죽음을 이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며 축제를 지낸다. 첫 사도가 된 막달라 마리아 부활절 아침 세상 곳곳에 울려 퍼진 ‘기쁨의 종소리’처럼 한 여인의 행적이 축제의 전례 때마다 선포된다. 그녀
교회가 수세기 동안 너무 억압적이었다는 것을 교종이 설교에서 몇 번 더 말했더라면 너무나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계속 애쓴다. 십자군을 옹호한다든가, 갈릴레오에 대한 교회의 처우를 옹호하는 것, 혹은 대량학살에 대한 우리의 부적절한 응답을 옹호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단지 개인들만이 아니다.
겸손 8-박춘식 물 스승님 얼굴 없지만 어디든 계시는 그리고 우리 몸속 가득 계시는 스승님 흙 스승님 천 가지 만 가지 얼굴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지켜주시는 스승님 바람 스승님 겸손의 향기를 옮겨주면서 어디든 함께 가고 늘 한발 앞서 날아다니는 스승님 호수 물가에 가면 세 분 스승님을 함께 만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기 시작한 곳도 갈릴래아 호숫가였다 &
무형무상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모습이 없으시다. 그는 세상의 어떤 모습과도 닮지 않은 무형무상의 신이시다. 이스라엘의 경전인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형상화를 금했고 그 영향이 이슬람에까지 미쳐, 두 종교문화권에서 조형예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슬람에서는 조형예술 대신 아라베스크 문양이 고도로 발달했다. 야훼께서 당신의 형상화를 금지한 말씀들은 다
교회는 거룩하고 죄악이 많으며, 얼룩이 없지만 오점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는 교회를 깨끗한 물로 씻어서 '티나 주름이나 그 밖의 어떤 추한 점도 없이 거룩하고 흠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에페소서 5,26-27) 당신 앞에 서게 한다. 교회 역시 죄악을 저지르고 혼란스러우며 고통을 겪는 백성들로서 끊임 없이 육욕과 탐욕의 권세에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으면, 제자들이 다시 모여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분을 살아 계시다고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났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고, 토마스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주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주간 첫날이면, 오늘의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비밀리에 집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하신 일을 함께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다. 그러나 누가 가난한 사람들인가? 처음에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빈민가에 살고 무료급식에 줄서고, 길에서 자며, 감옥에, 정신병원에 그리고 양로원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매우 가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바로 우리 가족 안에, 교회에, 직장에 있을
우리사회는 개인주의를 지지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 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하는 것 모두가 우리의 개인적 성취이며 개인적인 관심을 받을만하다고 믿도록 세뇌 당하고 있다. 그러나 성인들의 통공에 속한 사람들로서 우리는 모든 영적 가치가 개인적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공동생활의 결실임을 알고 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든, 예수에 대하여
그분은 늘 살아계십니다 -박춘식 저도, 종려나무 가지 들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옷을 깔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빌라도의 이 한 마디 순간 제 무릎이 망가졌습니다 제 마음이 길바닥에 산산 조각났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벅차게 꿈꾸던 기다리던 왕국도 사라졌습니다 소름 끼치는 칠흑 예루살렘 그리고 참담한 끝장 그날
공동체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하나는 용서이며 다른 한 가지는 기념이다. 용서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느님이 되지 못하는 것을 내가 끊임없이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나의 모든 요구들을 채우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의 모든 요구들을 채우지 못한 것에 용서를 청해야한다. 우리 존재의 중심인 우리 마음은 하느님의 일부분
베르나노스, “아무러면 어떤가, 모든 게 은총인걸.”세상을 하직하면서 마지막으로 발설하는 사세구(辭世句), 임종계(臨終偈)처럼 간절한 말도 드물다. 불세출의 작가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1948년)는 불후의 명작 를 마무리하면서 참으로 심오한 사세구를 빚었다. "깡
세상은 새로운 성인들, 몰아지경에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너무나 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새로운 국제질서를 자유롭게 구상한다. 그 질서 안에서는 정의가 다스리고, 전쟁이 더 이상 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선호적 방법이 되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비전을 일별할 수 있다. 쟝 바니에가 20년전 두 명의 장애인들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비일, 곧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이 점에 있어 마르코 수난사와 요한 수난사의 기록이 온전히 일치한다. 마르코는 예수의 장례 일시를 다음과 같이 명기했다. “이미 저녁이 되었고 실은 준비일, 즉 안식일 전 날이었다”(마르 15,42). 마르코의 예수 장례기를 보면, 서산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기다리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자면 공동체는 소속감을 발생시킬 뿐만 아니라 소원함도 느끼게 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함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충만하게 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돕지만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함께 하는 것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