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앨뷰쿼크의 교도소 담당 신부다. 그곳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궤변 같은 이론이 없고, 모호한 언어놀음에 빠지는 일도 없다. 그들에게 죽음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도 분명한 것이다. 현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상황이기에, 정신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
비닐하우스 성당 / 정호승 봄이 오면 배추밭 한가운데 있는 비닐하우스 성당에는 사람보다 꽃들이 먼저 찾아와 미사를 드립니다 진달래를 주임신부님으로 모시고 냉이꽃을 수녀님으로 모시고 개나리 민들레 할미꽃 신자들이 일개미와 땅강아지와 배추흰나비와 저 들녁의 물안개와 아지랑이와 보리밭과 함께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흙바닥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형제자매들,우리는 어둠이 사라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오랜 세월 선교활동을 하면서우리는 그것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특별히 어떤 사회문제를 당할 때,우리는 어둠이 사라지기를 바란다.세계의 기근이 소멸되기를 바란다.세상 모든 무기가 사라지고더 이상 사람들이 서로 죽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하지만 우리는 번번이 두 손 들고어둠이 거기 있
우리는 진실의 참 근원을 알고 있다.미국 정치판의 거짓 허울을 벗기겠다면서나는 지금 리처드 로어의 진실을 위하여싸우고 있는 건 아닐까?과연 나는 예수가 하느님의 통치라고 부르신그 위대한 진실에 접하고 있는 것일까?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으며이 일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가진짜 문제임은 알고 있다.예수께서 당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의&ls
성 보나벤투라와 성 토머스 아퀴나스는 존재(being)와 선(goodness)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우리가 순수 존재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거기서 곧 심오한 선(善)을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관상하는 이의 수단이요 목적이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관점이다. 그것이 원초적 복(Original Blessing)이다. 예수가 그 나라를 아신 것은
고자론의 두 가지 형태 예수께서 세 부류의 고자들을 거론하신 단구(短句)가 마태오 복음서 19장 11~12절과 유스티누스의 1권 15장 4절에 수록되어 있다. 두 가지 기록의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그 내용은 같다. 마태오 복음서에 실린 단구보다 유스티누스 교부의 호교론에 실린 단구가 예수님의 발설에 더 가까우리라는 설이 있다(요아킴 그
예루살렘의 난민들에게 연설한 스바니야와 감옥에 갇힌 몸으로 필립비 교회에 편지를 보낸 바울로는 불가사의한 기쁨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를 옹근 전체와 성결함으로 부르고 있는 그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감정의 폭을 크게 초월하여, 순종함으로써 기쁨을 길어 맛보게 하는 깊은 우물을 가리킨다. 그 기쁨이 결국은 하나의 결단이요 선택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하느님에게로 가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생존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안에 계속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실 부활과 승천은 별개의 두 사건이 아니었습니다.부활과 승천을 분리해서 기억하는 것은 과거의 우주관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우주가 세 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선사(禪師)들은 말한다.거울은 에고도 없고 마음도 없다고.거울은 얼굴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얼굴을 비춘다.테이블이 나타나면 테이블을 비춘다.굽은 것은 굽게, 곧은 것은 곧게 보여준다.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분별심도, 자의식(self-consciousness)도 거울한테는 없다.무엇이 다가오면 받아들이고 떠나가면 떠나보낸다.거울은 언제나 자기를 비워
구럼비야 구럼비야- 박춘식 제주는 하느님의 맑은 눈 파도 하얀 물보라로 씻고 뭍의 나무 향기로 닦는 눈동자 외통수 아집만 가진 이들이 매캐한 화약 연기 다래끼를 만들고 기름 시꺼먼 안약을 퍼붓다니 청정 그 바닷물로 청향 그 바닷바람으로 청순 그 바다 돌덩이로 청청 그 하늘빛으로 강정아 본래대로 돌아오너라 강정아 본래대로 돌아오너라 얼른 돌아오너라 구럼비야
교회는 세례자 요한과 같다.또한, 예수의 몸과 같다.예수의 몸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죽어야 했다.세례자 요한은, 자기를 넘어, 그 나라를 온몸으로 가리켜야 했다.교회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다.교회는 목적지로 가는 길이다.길을 목적지로 만들 때 우리는 우상을 빚는다.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가장 큰 죄, 어쩌면 유일한 죄다.(from Preparing for
- 뉴욕주 시라쿠즈 - 들판은 괴로와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른 봄이라 아직 땅은 쟁기의 맛을 보지 못하고 있었고 돌봐지지 않은채 내버려져 있었다. 풍요의 희망도, 이 해에 곡식을 제대로 얻으리라는 약속도 느껴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집들도 변덕스러운 기후에 시달리고, 페인트칠이 안된 나무판자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농장들의 모습은 흘낏 볼때는
모든 거짓 종교가 하나의 미망(迷妄)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한 입으로 “당신 나라가 오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입으로 “내 나라는 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두 나라에서 이중국적을 가진 백성으로 살려고 할 때, 말로는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할 때
주제 :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 거룩한 삶에 참여하도록 운명지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과 우리의 깊은 자아 모두로부터 유배된 우리 모습을 발견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참다운 정체성을 세우고 우리 삶의 여정의 목표가 되는 모든 실제의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한다.시작 기도 :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께로 빨리 돌아가게 하소서.
천사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마리아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대신, 곧바로 움직였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루가복음 1, 39). 여행 계획을 세웠다거나 누구와 동행했다거나 여행 도중에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언급은 일절 없다. 아브라함처럼, 날개 달린 수호천사처럼, 행동과
베들레헴처럼, 우리는 너무나 왜소하여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함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러나 너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미가 5, 1). 하느님의 온전하심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 사랑하기를 배워서
“오소서, 주 예수여!”(요한묵시록 22, 17). 그리스도교 성경은 예수를 초대하는 마지막 말로 마감된다. 다가올 무엇이 아직 여기에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오소서, 주 예수여.” 이 말에는, 전체 그리스도교 역사가 일종의 선택된 미완성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도 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말씀에 이어진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예수님으로
야훼, 나의 하느님!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나를 뒤쫓는 모든 자들에게서 구하시고 살려 주소서. 사자처럼 달려들어 이 목숨 발기발기 찢어도 살려줄 자 어디 있사옵니까?야훼, 나의 하느님! 아무러면 제가 이런 짓을 했으리이까? 이 손으로 받지 못할 것을 받기라도 했다면, 친구에게 선을 악으로 갚기라도 했다면,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를 살려주기라도 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