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던진 돌-박춘식 밭을 매다가 손에 잡히는 돌을 밖으로 내던진다 어릴 적 호미처럼 쪼그리고 앉아 김을 매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내가 던지는 무심한 돌에 먹이를 끙끙 나르던 개미가 맞아 죽는다 죽은 개미의 어멈에게 무슨 말씀 드려야 하나 그 형제들에게 어떻게 사죄드려야 하나 모르고 한 짓이라고 말하면 될까 지구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데
하느님 나라 백성은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여전히 가짜-자아로 살아가는 자들, 환각의 거짓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은 역사를 멈추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같은 일을 반복할 따름이다. 생각을 집단으로 하고, 무엇을 뚫고 나아갈 힘이 없는 그들은 모든 시대의 모범생, 겁쟁이, 근사한 생각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어른들이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모든 사람 속에는 가장 단순한 원형이 둘 있는데, 소년(소녀)과 노인이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둘 가운데 하나가 지배한다. 이 둘이 사이좋은 친구로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 둘이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소년(소녀)은 피어나는 꽃들을 부추기고 노인은 가을걷이를 관장한다. 소년(소녀)
1. 왜 수행을 말하고 있는가?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 사람들은 늘 나아지는 것을 추구하는데, 추구의 끝에는 유토피아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나빠지거나 무의미를 경험할 때 삶에 대해 부정하게 되고 관습적 삶을 불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해답을 얻고자 고뇌하며 이상과
사도 바오로의 친서를 살펴보면 그가 지녔던 이중적 여성관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임을 의식하고 말할 때는 남녀평등 사상을 피력하지만 헬라 유다인 기질이 발동해서 말할 때는 남존여비 사상을 드러낸다. 우선 남녀평등 사상에 대한 대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여행중 갈라디아 지
오직 사랑만이 스스로 충족하다.사랑 자체가 사랑의 목적이요 업적이요 만족이다.사랑은 사랑 아닌 데서 근원을 찾지 않고,사랑 밖에서 열매를 구하지 않는다.그 열매가 곧 그 쓸모다.내가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이기 때문이다.사랑이 나의 깊은 실체요, 사랑 안에서, 사랑을 위하여, 나는 창조되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하느님 안에서” 사랑
복음서들에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오늘 21세기에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 혹은 로마 제국 영토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교양, 지식, 편견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오늘 우리에게 기적은 자연법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영적 성숙의 양성은 외향적 침묵을 요하는데, 이것은 안으로부터 침묵을 깊게 하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더 심오하게 이끌어 준다. ◆ 시작 기도신비의 하느님, 제가 침묵 속에 살기를 배우도록 해 주소서. 저의 걱정과 긴장, 언행들을 침묵 속에 침잠시켜 주시고 당신 사랑의 침묵 안에 저의 삶이 닻을 내리게 하소서. ◆ 머튼에 관하여 머튼의 침묵에 대한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고, 하느님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인류를 상징한다. 중세기 사람들은 이에 대한 감성이 특별했다. 그들은 거대한 망토를 어깨에 두른 여인으로 마리아를 그렸다. 그 망토 아래에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이 모여 있다. 그녀는 하느님 말씀에 “예”라고 답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의미를 자기 몸으로 요약했다. 마리
매리지 엔카운터(Marriage Encounter, 약칭 ME)는 배우자들에게서로 싸우는 법을 가르친다.상대방 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그러는 동안 잡은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결혼한 사람들은 그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고 말한다.왜냐하면 누가 자기를 해친다고 생각될 때우선 그를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미운
유월 십자가 - 박춘식 하늘은 언제까지 내려다보기만 하려는지 주르륵주르륵 걸려있는 눈물 철조망 절벽 앞에서 몸부림 붉은 깃대 위, 어쩌다 나타나는 하얀 비둘기 유월이 운다 - 녹슨 기관총이 운다 - 시꺼먼 기차 바퀴가 운다 - 피를 토하며 부르짖던 어머니 온몸으로 운다 - 비로봉이 어응어응 운다 - 바위에 눌려있는 군번이 운다 - 군번 없는 병사는 버클로
그리스도인은 세례 받을 때,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데 우리는 평생을 바친다. 우리는 우리 자리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니다. 이미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신성한 존재다.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이 사실에 동의하자.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한때 하느님 안에 있다가 지금은 하느님 밖에 있다. 그게 우리다.
예수의 여성관을 거론하기 전에 우선 유다교의 여성관이 확연히 드러나는 전거 둘을 인용해 보겠다. “(기원전 150년경에 활약한) 예루살렘의 요세 벤 요하난은 이렇게 말했다. ‘너의 집은 활짝 열어놓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족인양 받아들여라. 그러나 여자들과는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자기 아내와도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앎 앞에 사랑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학이다.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을 참으로 안다.뒤로 물러서서 냉정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한우리는 결코 모를 것이다.우리 자신을 누구에게 내어줄 때에만그가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사랑이 이해에 선행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때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
쫓겨난 자, 가난한 자, 보잘 것 없는 자들은 언제나 교회로 와서우리 앞에 불안, 무능, 개운치 않은 마음, 성(性) 문제, 중독 등우리가 싫어하는 선물들을 내놓는다. 우리는 우리와 같지 않은 자들,우리가 속한 제도에서 성공하지 못한 자들,예컨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멀리한다. 그래도 우리는 무언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그래서 교도소를 방문한다.왜 가는가?거
오늘 신학 마당에서 공동으로 통하는 구절이 있다.‘가난한 이들의 우선적 특혜’가 그것이다.가난한 자들, 불의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자들 쪽으로하느님이 기울어지신다는 뜻이다.이건 좀 낯선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우리 프란체스코 수도회는지난 8백 년 동안 의심의 여지없이프란체스코 성인이 바로 그런 믿음으로 살았다고 알고 있다.하지
고대 중동에서는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는 종교 의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생물에게 생기를 주어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고대 중동의 종교들은 물의 이런 속성을 이용하여 의례를 만들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몸을 씻어 죄에서 정화되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의례입니다. 이 의례의 관행이 구약성서에 흔적으로 남은 것
주제 : 머튼은 고독이 수도자에게는 필수적이며 하느님과 친밀하게 되기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고독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고독은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고, 우리가 상처받는 존재임을 알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준다. 시작 기도 : 오 하느님, 당신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고독으로 저를 이끌어 주시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의 친밀
남성 문화에서 여성 문화로 옮겨간 첫 번째 여정을나는 ‘사랑받는 제자, 요한의 여정’이라고 부른다.그는 본인을 포함한 열두 남자 제자들 가운데서예수 가슴에 머리를 묻고는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그것을 사회적으로는 아니더라도정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우리들의 대부분일 것이다.우리는 지나친 동성 공포증(
아침 겸손 - 박춘식 나는 겸손이 되려고 이른 아침부터 겸손을 생각한다 하늘에게 인사하고 두 손으로 흙 품 만지며 지구에게도 아침 인사를 한다 하늘과 땅이 새큼한 겸손을 건네주면 새들은 아침 겸손 날개를 펴고 나무들은 겸손 가지를 하늘로 치켜든다 별이 눈을 감는 아침은 겸손이다 — 라고 생각하면서 잠잠한 겸손을 만나는 일이 첫 일과이다 &md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