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면 그날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날 묵상 중에 올해 2월 말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에게 이제 우울증을 훨훨 털어 버리고 기쁘게 살라고 말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과 함께 문득 용을 그렸다. 그런데 내 그림 실력은 졸라맨 수준이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용이 아니라 도마뱀이었다. 베드로에게 그림을 보여 주며 “뭘로 보여? 도마뱀같이 보이지?”라고 묻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용이네.”라며 나를 위로한다. 내가 그린 용을 보면서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화룡점정의 심정으로 심리상담을 받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사건이다.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에 대한 진실에 직면하자 삶의 고민을 시작하여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떨쳐버리고 질긴 가족의 연도 끊고 출가했다. 나에게도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고 기억되는 어느 날 우리 윗집에서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심 가득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집으로 달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아주머니는 흰색 옷을 입고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 모
2019년 2월 23일 아버지는 92살 생신을 4일 앞두고 돌아가셨다. 연로한 부모님을 둔 자식은 아침 일찍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날 아침 6시경 큰오빠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며칠 전까지 음식물을 사서 배낭에 짊어지고 와서 직접 요리해 드시던 아버지가 사전 예고 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나에게 아버지는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보여 주셨던 분이다. 어린 시절 엄니가 막내인 내게도 피부접촉을 허락하지 않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나 주워 온 딸이지?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쌀쌀
엄니(89살)가 속한 세대의 여자는 평생 3명의 남자에게 귀속된다.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는 결혼 전까지 딸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다. 결혼 후 살게 되는 남편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시집 식구와 함께 부인의 삶을 억압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은 남편과 사별 뒤 어머니가 기대야 할 기둥 역할을 한다. 가부장 제도의 위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그 시절의 여자가 한 주체로서 독립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려면 죽음을 각오하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여자는 가부장 제도의 희생자였고, 남자는 가부장제의 수혜자였다. 엄니의 인생은 그 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는 모든 연령층의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특별히 어린 시절 아이에게 부모의 지지와 격려는 절대적이다. 부모가 그 시기에 어떤 태도로 양육했는가는 자식의 인격-감정과 이성-과 자존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순간들에 엄니가 취했던 너무도 객관적이고 차가웠던 태도는 내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나를 대하는 엄니의 태도는 인생 초반기 자존감을 형성할 때 장애로 작용했고, 그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마다 낮은 자존감으로 드러나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우울증에 걸렸을
나는 신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몇 번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살아 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시간에는 그동안 나를 살아 움직이게 했던 열정과 기쁨을 내 밖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다. 2006년 감정의 화산이 폭발한 그 순간에, 어쩌면 훨씬 더 이전에 시작한 심적 침체는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을 빼앗아가 버렸다. 자고, 먹고, 싸고, 일하는 반복적이고 무의식적이었던 모든 행동에 ‘왜’라는 의문표가 붙으면서 일상의 무게가 버거웠다. 생을 포기하는 사람의 심정을 겪어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2009년 그해 겨
일상은 거북이걸음처럼 느리게 가고 휴가는 화살처럼 날아가듯이 안식년 2년은 쏜살같이 지나 2007년 말 고국에 왔을 때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다음 해인 2008년 초 아버지는 전립선암 진단을 받으셨고, 자식 중에서 가장 시간이 많다고 여긴 나를 당신의 병원 진료 보호자로 택하셨다.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아버지를 꼼짝없이 따라다녀야 했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한 나는 한기에 계속 노출되자 감기 기운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심한 기침을 동반한 폐렴으로 발전했다. 아버지는 다행히 초기에 암이 발견되어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지 않
남편 베드로와 나는 2005년 9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이탈리아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우리는 결혼 10주년 되는 해에 안식년을 갖기로 했는데, 계획보다 3년 앞당겨 각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 우리는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고 안식년 동안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류비용을 충당했다. 2005년은 우리 둘에게 참으로 어려운 해였다. 그해, 나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궁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고, 베드로는 본당 체육대회에서 줄다리기 하던 중 우승에 눈먼 상대편 한 사람의 타격을 받아 한쪽
엄니는 89살로, 슬하에 3남2녀를 두셨고 난(큘라-조카손자가 나에게 지어준 별명으로 드라큘라의 줄인 말) 다섯째 중 막내딸이다. 올해 2월 23일, 엄니는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셨다. 7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얼마나 허전하시냐고 물었더니 “전혀 아니네요.” 하신다. 엄니는 남편 잘못 만나 평생 고생하다가 늙을 말년에는 병든 육신만 남아 힘들다며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종종 회상하신다. 남편 복은 하나도 없어도 자식 복은 있어서 다행이라며 홀로 남은 인생을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계신다.엄니는 평소 지병인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