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바람이 잠잠한 날이면, 아이들과 집을 나선다. 우리 집 새 식구인 강아지 보들이도 함께다."가자, 산으로!""또 산에 가? 저수지 위에 냇가로 가자.""냇가에 가면 너희들이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잖아. 아직은 추워서 안 돼. 그리고 갈쿠나무(불 땔 때 불쏘시개로 쓰는 마른 잎이나 잔가지. 마른 솔잎이 가장 좋다.)도 해 와야 한단 말이야."
시골에 살면서 처음 일이 년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한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자유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자유가 버거웠고,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남들은 뭔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마냥 나 편한 대로만 지내도 되
도시, 그러니까 화순읍에만 나가도 다울이는 신기해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데다 너나할 것 없이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치는 사이인 것이 너무 어색한가 보다. 하기사,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지나가도 일단 인사부터 하고 보는 녀석이니까."엄마, 여긴 도시라서 그래? 모르는 사람이 진짜 많아.""당연하지.
세월이 그냥 흐르는 건 아닌가 보다. 청국장을 띄울 때마다 실패를 거듭해서 자신이 없었는데 이젠 감을 잡았다. 얼마 전부터는 띄웠다 하면 하얀 실이 줄줄실실 잘도 나온다. 지난겨울엔 고군분투 하긴 했으나 친정 엄마 도움 없이 김장을 해 냈는가 하면(김장 독립!), 우리 신랑이 이게 떡이냐 빵이냐 되물었던 홈메이드 빵도 이젠 제법 잘 부풀어 빵 꼴을 갖추어
얼마 전에 귀농한 지 1년이 채 안 된 초짜 농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럿이 함께 모인 자리였는데 나 빼고 대다수는 귀농을 동경하는 젊은 아줌마들이었다. 초짜 농부는 그이들을 상대로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귀농 예찬론을 펼쳤다."시골 사니까 생활비가 확 줄었어요. 도시에서처럼 폼 나게 입고 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옷 값 거의 안 들죠, 애들 교육비
"어머, 생긴 것도 더럽게 못생겼네."애꿎은 개가 무슨 잘못이겠냐마는 한평 할머니 집 댓돌 옆에 묶여 있는 사냥개를 도저히 고운 눈길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분명 뒷집 아저씨가 은근슬쩍 맡기고 갔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뒷집 아저씨는 늘상 이런 식이다.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을 은근슬쩍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 본인이 사냥을 좋아해서 사냥개를 키우는
아랫마을과 우리 마을이 행정구역상으로는 한 동네나 마찬가지라, 두 마을에서 공동으로 이장을 뽑는다. 아니, 뽑는다기보다 누군가 추천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동조하는 의미로 박수 몇 번 치는 걸로 이장 결정이 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마을에서 힘깨나 쓰는 양반들이 총회 전에 사전 합의한 내용을 총회에서 최종 승인만 내리는 거라고나 할까?하지만 이번 선거
어설프게나마 농사를 짓고 살아가게 된 지도 어언 9년째 접어든다. 농사 규모가 많지는 않지만 먹고 싶은 건 다 가꾸어 먹다 보니 씨앗 종류만도 수십 가지! 전 해 심었던 걸 안 심게 되기도 하고, 원래 있던 씨앗을 다른 종류로 바꾸어 심기도 하지만 어쨌든 해마다 조금씩 씨앗 종류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면서 느끼는 건 씨앗이 한 종류 늘 때마다 삶이 조금씩
따스한 햇볕이 겨울 추위를 누그러뜨리는 한낮이면 쌍지 할머니 집에 놀러 간다. 할머니 집에 가면 귀여운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일곱 마리 강아지들! 그 여린 생명들이 꼬무락거리며 움직이고 마당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사실 처음엔 좀 망설여졌다. 여기도 강아지똥, 저기도 강
서울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느라 열흘이 넘게 집을 비웠더니만 일상의 리듬이 뚝 끊어졌다. 양념을 어디에 뒀는지 반찬거리는 뭐가 있는지 마른 장작이 어디에 쌓여 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정리할 옷가지가 방 하나로 가득 차서 널브러져 있고. 식탁 위에는 그릇이 수북하니 나와 있고. 집 안팎 구석구석이 죄다 내 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일상생활 요리교실지난해 겨울, 우리 집에서는 작은 요리교실이 열렸다. 수강생이라 봤자 수봉 할머니 집 손자 기명이와 손녀 수빈이, 그리고 우리 집 다울이까지 세 명. 기명이가 겨울방학을 끝으로 중학생이 될 거라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 줄 수 없을까 해서 기획한 일이었다. 수업 날짜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될 때마다 만나서 함께 떡볶이, 김밥
우리 집엔 냉장고가 두 대 있었다. 결혼할 때 막내 이모가 선물로 사 준 일반 냉장고와 화순으로 이사 올 때 친정 엄마가 사 준 스탠드형 김치 냉장고. 하지만 덩치가 큰 가전 제품을 둘이나 사용한다는 게 꺼림칙해서 김치 냉장고만 쓰고 일반 냉장고는 전기 코드를 빼고 창고처럼 사용했다. 멀쩡한 걸 내다 버리기는 아깝고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줘야지 하고 있었는
동래 할머니 마당이 휑하다. 넓은 마당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콩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어머, 마당이 허전하네요. 콩 타작을 어찌 하셨대요?”동래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그냥 웃기만 하시고, 할머니 집에 오시는 요양 보호사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을 하신다. 광주 사는 아들이 와서 다 거두어 갔다고. 씨로 쓸 거 한 주먹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아
얼마 전에 다울이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다울이 어머니, 다울이 건강검진 결과 받으셨죠? 다울이가 빈혈이 약간 있네요. 체중이나 키도 평균치보다 떨어지고요. 우유 먹고 고기 먹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성장이 많이 더뎌요. 성장 호르몬이나 항생제 때문에 고기를 멀리 하시는 거라면 집에서 직접 짐승을 길러서라도 단백질을 보충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과 산에 다녀오는 길, 여기저기서 두들겨 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콩이며 팥, 들깨 따위를 타작하느라 한창 바쁜 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일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비 오기 전에 부지런히 털어 낼 생각으로 마을 할머니들은 저마다 콩대 더미, 팥대 더미 앞에서 돌부처가 되고야 말았다.하루 종일 두들겨 패시려면 얼마나 어깨가 아프실꼬. 하
다랑이가 졸려하기에 업고 밭으로 가는 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할머니들 사는 집을 슬쩍슬쩍 넘겨다보며 골목길을 걷는데 동래 할머니가 툇마루에서 발을 만지작거리며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어 초조한 듯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처럼 처량해 보이기도 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몇 번 망설인 끝에 할머니
아침저녁 쌀쌀한 바람과 한낮의 땡볕이 묘하게 어우러진 가운데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시퍼렇던 감이 오늘은 슬며시 주황빛을 머금고 있는가 하면 애호박도 무서운 기세로 여기저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곧 있으면 밤송이도 툭툭 떨어질 테고 땅속 고구마도 잡아먹기 좋을 만큼 굵어질 것이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을은 가지각색 선물을 받는 시간,
지난 3월초에 정들었던 차와 이별했다. 엔진 고장으로 막대한 수리비가 드니 폐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워낙 낡은 차이다 보니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그런 일이 생기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버스 타러 나가는 데만 1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데, 아이들을 데리고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나. 앞으로 발이 꽁꽁 묶이는 건 아닌가.
지난 장날, 유명 방송사 봉사단 주최로 우리 면에서 경로잔치가 열렸다.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대거 출연하고, 양 · 한방 의료진이 무료 검진과 치료를 해준단다. 뿐만 아니라 커플 사진 촬영과 웨딩마치 이벤트에 경품 추첨까지! 별 다를 거 없는 밋밋한 일상을 사는 할머니들에게 와서 신나게 놀아보라며 청량음료 같이 톡 쏘는 유혹을 했다.대부분의 할머니는 ‘얼씨
“호박 다 엥겼어?”“아직요.”“깨는 숭궜어?”“아마 안 심었을 걸요?”“아따, 싸게싸게 숭구지 뭐하고 있어. 그러다 때 놓치면 우짤 거여.”요즘처럼 농사일이 바쁜 때에도 틈틈이 우리 집에 들러 농사 훈수를 두느라 더 바쁜 수봉 아주머니. 나와 우리 신랑을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잔소리를 하신다. “제발 저희를 가만히 좀 내버려두세요!”하고 소리치고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