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의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는 ‘이슬람교도’를 의미하는 은어로 ‘무젤만’이라는 용어가 쓰였다고 한다. ‘무젤만’은 단순히 종교인으로서의 무슬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특징을 더 이상 갖지 못한 이들을 의미하는 은어였다.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처절하게 죽어나가는 일도 낯선 풍
악의 평범성과 도덕적 개인한나 아렌트는 2차대전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책 (1963)으로 만들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악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어떻게 평범한 것일 수 있을까.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이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반복적으로 진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히만이 엄청난 사태의
한국은 ‘서울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서울 중심적이다. 집값도, 수입 규모도, 대학 경쟁력도 서울이거나 서울에 가까울수록 비싸거나 많거나 높다. (물론 이때의 ‘서울’은 특정 지역을 의미하기도 하고 ‘대도시’의 상징으로 쓴 말이기도 하다.) 서울 중에서도 중심부에 사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사실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내 자신도 십 수 년
동해는 어디인가 일년간 일본 도쿄에 머문 적이 있다. 도쿄는 위도상으로는 일본 열도의 중간에, 경도상으로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중앙의 제일 큰 섬 혼슈(本州) 동남쪽 도쿄 인근 지역을 관동(關東, 간토)이라 하고, 오사카가 있는 지역을 관서(關西, 간사이)라 하며, 관동과 관서의 사이 지역을 동해(東海, 도카이)라 한다. 한국에서 볼 때 일본은 동쪽에 있지
한자 문화권에서는 종종 ‘신심’(信心)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때의 신심은 말 그대로 ‘믿는 마음’이다. 이때 믿음과 마음의 관계도 중요하다. 어법상으로 믿음은 마음의 수식어처럼 되어 있지만, 정말로 ‘믿는 마음’이라면 그때 믿음과 마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정말 믿는 마음이라면 한쪽에서는 믿
믿음은 관심이다 이제까지 믿음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그리고 지성, 사랑, 의지, 용기, 기대, 희망 등 믿음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이들을 종합하는 개념을 하나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 ‘관심’이라는 말이다.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이 끌려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믿음, 있거나 없거나 믿음에 크고 작음, 강함과 약함이 있을까? 믿음이 2%의 의심이 극복되고 의심하던 내용이 사라진 상태라면, 믿음은 크기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이 본래 주어진 바탕 위에서 너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면, 믿음은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된다.
‘믿어짐’이 ‘믿음’이 되려면 - 2%를 채우려는 의지와 결단 물론 믿는 능력을 타고났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믿음이 어느 순간 주어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주어지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의지이다. 의지는 어떤 일을 이루려는 마음이다. 의지에는 언제나 목표가 있게 마련이다. 그
마찬가지로 일단 믿게 되면 그다음은 믿지 않으려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믿지 말아야지’ 작정해도 내적 상태가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믿는 것이 내 마음대로가 아니었듯이, 믿지 않는 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적절한 때에 믿지 않게 될 수 있을 뿐, 아무 때나 내 마음대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수도자가 수도회에서
믿음은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어느 순간 내 안에 ‘생기는’ 것이다. 믿음은 내 맘대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이요 은총이다. 인간의 내면은 셀 수 없이 많은 관계망 속에서 여러 후천적 요인들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다. 단순히 내가 만들어 내
‘믿음’ 하면 ‘종교’를 연상하곤 하지만, ‘믿음’은 인간 관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 만한 불행과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내가 너를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lsq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자유 없이 일방적으로 통과되었다. 불균형적인 산업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무역하자’는 협정 자체가 모순이었는데, 자유를 저당 잡아놓고는 자유 협정을 체결하는 모순이라니,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 자괴감만 커진다. 자유가 무엇이던가. 자유는 “스스로(自) 말미암음(由)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예수도 사회적 위기 상황을 고발하고, 위기 상황의 중심에 있는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이스라엘 전반에 대해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했다.(207-212) 예수는 자기 동족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던 지도자들에게 “눈멀었다” 비판하면서, 소경 인도자를 따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깊은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미국 오레곤 주립대학 교수이고,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이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 학문적 양심에 솔직하고, 신앙의 성숙을 향한 열정도 담겨 있다. 교회에서의 가르침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가 20여년만에 돌아와 지성적 신앙생활이 가능
지난 번 보았듯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거룩’의 에토스를 지키고자 했다. ‘거룩’은 부정한 것으로부터, 즉 거룩을 더럽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러다보니 정결-부정, 성-속, 유대인-이방인, 의인-죄인 도식이 팽배
지난 번에도 보았지만, 성경에는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나온다.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과 같은 것들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보다는 치유 이야기 속에 담긴 상징적인 의미이다. 성경에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제자들을 보내 이렇게 묻는 장면이 나온
지인 중에 대형 금속 주물을 생산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있다. 이 분은 물건을 생산해내는 제조업이야말로 어느 분야보다 정직한 직종이라는 지론을 펴곤 한다. 물건을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돈을 버는 제조업은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이다.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요사이 이른바 ‘이슬람 채권법(수쿠크)&rsq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