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예뻐집니다. 딸인 제가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변 이들이 엄마에게 하는 소리입니다. 성당교우이시며 엄마를 어린 동생 같이 귀여워하신다는 80대 할머님은 최근에 이런 말씀을 하셔서 주변 할머님들이 막 웃었다고 합니다. “야... 요셉피나야, 너 요새 왜 이렇게 대책 없이 예뻐지냐?” 엄마는 원래 예뻤습니다. 처녀시절, 엄마는 주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신학연구소는 새 길 찾기를 위해 노력했다. 지나고 나니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다. 이를 통해 얻어진 결론을 보면 다시 제자리에 선 셈이다. 우리신학연구소는 연구와 실천을 통합해야 한다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결론이다. 하지만 헛바퀴를 돈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1년 동안의 논의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이 연구소의 과제와 미래에 대해
김진호 목사가 1월 11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에 살처분된 100만 마리 소와 돼지를 위해 종교인들이 모여 애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제안을 내가 했다고 썼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지난 1월 5일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들이 모여 새해 연구 과제를 생각해보는 워크숍을 했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엄기호 연구위원이 그 같은 제안을 했다. 특유의 감수성으로 가끔 시대
복음서를 보면 예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에게 반한 지체 높은 분들도 계셨지만, 대부분 창녀, 소경, 절름발이, 세리 등 무지랭이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주변에 성소수자는 없었을까? 만일 있었다면, 예수는 그들을 어찌 대하셨을까? 최근 정진석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을 때 생물을 암수로 만드셨고, 암수가 정상이기 때문에, 죄
지난 11월 6일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 천주교사회운동 자료와 선배들의 얘기를 통해 어떤 분인지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류 신부님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07년 여름 국제가톨릭지성인문화운동(이크미카) 총회 참석을 위해 케냐에 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우리(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곽은경과 엄기호, 나)를 당신 아파트로 초대해서 불고기와
엄기호 연구위원이 네 번째 책 을 냈다.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이라는 부제를 담고 있다. 앞서 낸 책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헌정사가 눈길을 끈다. ‘겉도는 말, 헛도는 삶’이라는 화두를 던져주신 조한혜정 선생님과 나와 함께 세상을 읽는 힘 있는 언어를 만드는
10월호 특집 : 당신들의 종교는 안녕하신가 카이사르와 맘몬의 유혹에 빠진 한국천주교회 수상한 움직임들 최근 9월호에 심층취재 기사 하나가 실렸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4대강에 빠진 천주교, 4대강 반대는 평신도와 소통 없는 ‘성직자 권위주의’의 산물” 머리글
8월 28일 토요일, 조카딸 함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순조롭게 함을 받고 술판이 벌어지려는 즈음 핸드폰이 울린다. 시간을 보니 저녁 8시 14분, 발신전화번호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사무실. 어, 지금 시간에 인권위에서 나에게 전화할 일이 없는데. 약간 불안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저, 천주교 인권위 아무개입니다.” 다음날 결혼하는
요즘 문정현 신부님이 명동성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신다. 시위 성격의 일인기도인 셈이다. 지난 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사제들이 명동 들머리에서 4대강 반대 단식기도를 하던 중 명동성당 사목위원들로부터 들었던 얘기, 젊은 후배사제들에게 “그러려면 사제 옷을 벗고 하라”고 한 얘기를 도저히 잊을 수도 참을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단식기
맡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2010년 8월 7일자 23면에 실린 영화배우 박중훈의 글 “배우의 마음으로...”을 읽었다. 영화 촬영 때 계백장군이 처자식을 칼로 베는 장면을 찍기 1주일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 몰래 잠자는 처자식을 노려보기 시작했다는 고백을 읽으며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반
지난달 말 수원교구 한 본당의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견진 교리를 했다. 이미 여러 차례 견진교리를 한 경험도 있고 미리 사정을 들어 각오했지만, 청중이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너무 다양했다. 견진대상자가 다양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일이다. 이번뿐 아니라 견진교리를 하러 가면 언제나 그랬다. 약속한 강의 주제가 있고 나름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이야기를 누구에
이제 편안하신지요? 스님께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스님을 처음 가깝게 뵌 것은 생명의 강 순례 길이었습니다. 처음 가깝게 뵌 스님에 대한 느낌은 수행자보다는 운동가였습니다. 스님은 잠깐 쉬는 시간에도 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셨고, 생명의 강을 살리는
지난 5월 10일 엄기호 연구위원의 특강 “용산, 제주에서 4대강까지…왜 다시 종교인가? - 속물들의 시대에서 가톨릭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를 들었다(강의 개요는 www.catholicnews.co.kr에서 볼 수 있다. 고동주, “넘쳐나는 속물들, 왜 성직자 운동만 확대되는가?&rdquo
두 종류 인간 몇 년 전 나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였다. 우리신학연구소가 주관한 중국천주교회 방문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정신지체장애인시설이었는데, 실무책임자가격인 한 젊은 남성이 자기네는 이 시설을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하고자 노력한다고 소개하였다. 설명과 질의응답이 진행되는 동안 온 마음을 실어서 우리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참
“우리는 이 시대 한국인의 하느님 체험을 쉬운 말로 풀어내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바람 나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2004년 1월, 설립 10주년을 앞둔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워크숍에서 처음 만들었던 우리신학연구소 사명선언문이다. 인천교구 시노드(1997년~2000년) 준비과정에서 본당진단프로그램을 개발한 뒤, 우리는 교구&midd
최근 김진호 목사의 책 을 읽었다. 요한복음을 다룬 이 책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한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시리즈 첫째 권이다. 책날개에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를 이렇게 간추린다. “이 시리즈는 복음서에 대해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공유하는 상투적 생각과 비판적으로 대면하고자 하는 의도
이 글을 끝으로 어줍지 않은 회고담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직 삶을 정리할 나이도 아니고, 정리할 게 있을 만큼 이룬 것도 없는 사람이 “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을 쓴 것은 젊은 평신도 가운데 단 몇 명이라도 평신도신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글에 달린 몇 개 안 되는 댓글, 그리
공짜로 얻어 쓴 우리신학연구실 사무실은 인천교구 부평4동본당 교육관의 3층 베란다를 막아서 만든 방이었다. 공간은 충분했지만 방이 좁고 길어서 특별 주문 제작한 작은 책상을 나란히 놓고 4명이 한 줄로 앉아 일했다.여름에는 무척 덥고, 겨울에는 무척 추웠다. 모든 것을 아꼈지만, 그래도 연구실 운영에는 돈이 필요했다. 수익사업으로 대부분의 사제가 강론 준비
1987년 가을, 한국 정의평화위원회는 처음으로 천주교사회운동 종사자 연수를 열었다. 연수 프로그램 가운데 활동 영역별 만남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전국 각 교구에서 청년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처음 만났다. 서울, 인천, 안동, 부산, 청주, 광주 등에서 모인 우리는 금세 의기투합했고, 그 뒤 격월로 전국 각 교구를 돌아가면서 모임을 갖고 경험과 자료를 나누
1982년 7월부터 2년 2개월 동안의 군복무를 마친 나는 남은 대학 4학년 한 해 동안 전공인 기계공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천주교 인천교구 청년회(인천교청) 친구들이 함께 활동하자고 제안했다. 인천교청은 해직교수, 언론인을 강사로 ‘민중대학’이라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대표적 진보 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