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손으로 나의 다섯 아이를 묻었다. 누가 죽더라도 슬피 우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가 세계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으며 형제가 다른 형제를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 갔다. 돈이나 우정이 시체 묻을 사람을 찾아 주지는 않았다. 집안사람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망자를 데려다 구덩이에 넣었다. 사제도 없었고 기도도 없었다."("하드코어 히스토리", 47-48) 이 글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절반을 앗
예수의 ‘하늘나라’는 긴박성을 띤다. 예수가 시대의 표징을 언급하면서 딱 짚은 인물 중 하나였던 요나만 봐도 그러하다. 요나는 니네베 도시에 파국이 이르렀음을 선포하며 즉각적 회개를 요청했고, 이에 니네베는 왕과 온 백성은 물론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루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단식과 회개로 돌입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었다: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8-9)
지난해, 누구도 팬데믹이 덮친 시대에서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때, 우리 대부분은 2020년을 계획하고, 나름 일정표를 짜며 여느 해와 다를 바 없는 한 해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새해 벽두에 우린 온통 뒤죽박죽인 채 모든 일정을 취소당해야만 했다. 이미 잡힌 혼사를 미뤄야 하는 청춘남녀들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연을 담은 일정들이 끊임없이 유예되다가 무산되는 일로 이어졌다. 일상은 시공간을 틀어쥔 팬데믹에 의해 사정없이 흔들리더니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부자유의 극치를 관통 중이다. 이러다가 다들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기고
이제는 완연한 10월, 상큼하고 쌀쌀한 공기가 감사한 절기가 돌아왔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이 가을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뭉클하기조차 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온 산하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고 노란 장관을 펼칠 것이다. 이렇게 강퍅한 시기를 보내면서도 가을은 여전히 우리 곁으로 다가와 한 번쯤 시인이 될 수 있고, 좋아하는 시구 한 소절쯤 읊조려도 좋다고 토닥인다. 아니 그런 여유를 내 보라 응원한다. 쓸쓸한 도시의 가을도, 기찻길 따라 펼쳐진 황금 들판도 모두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우리 사회 내부에는 수많은 종교지도자가 자신의 신도들에 둘러싸여 목회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를 어떻게 존경할지는 주관적 판단이나 이번 광화문집회 이후 코로나 대유행을 일으킨 모 종교계의 민낯은 두고두고 회자거리다. 종교인들에게 함부로 소명을 부여하고, 선택받은 자라며 추켜세우는 것이 얼마나 황망하고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온 사회가 실감한 자리였다. 그렇게 사랑제일교회의 폭주는 나라 전체를 다시 ‘스톱’시켰다. 모두들 간신히 팬데믹 종식만을 기다리며 아슬아슬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우리
용서(容恕)의 사전적 풀이는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주고, 상대를 ‘나와 같이 보는 마음’”이라 나와 있다. 용서의 용(容)은 ‘얼굴’을 나타내기도 하나 해석에 따라서 비워진 공(空)이나 운동(運動)으로도 쓰인다. ‘서(恕)’는 관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남(如:汝)을 나와 같이 보는 마음(心)이며, 남의 처지를 잘 헤아려 준다는 뜻을 지닌다. 모두 ‘용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통찰한 어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용’과 ‘서’는 어떤 사건에 제한을 두고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용서란 소유될 수 없는 대상의
세상에는 악한 사람도 많지만 착한 사람도 많다. 지옥 같은 경쟁에 내몰릴 때는 거침없이 ’헬조선‘이라 욕하던 사람들도 재난의 위기에 서면 달라진다. 그런 때는 여기저기서 답지하는 응원의 물결이 한 편의 서사처럼 극적이고 아름답다. 감동과 희망을 몰고 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살기도 바빠서, 내 한 몸 건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세상은 여전히 살맛 나는 곳임에 틀림없다. 지난 3월 코로나19로 아수라장이 된 대구 뒤에는 죽을 힘을 다해 진료소를 지킨 의료인들과 위험을 무릅쓰고 온정을 펼친 지역들이
장마가 예사롭지 않다. 언제부턴가 날씨에 관한 한 꾸준히 “유례없는”, “모든 기상관측을 갈아엎는”과 같은 수식어를 달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여름은 긴 가뭄이 아니면 홍수로, 겨울은 한파 아니면 온난화로 고착돼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상적이지 않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50일 넘게 쏟아지고 있는 물 폭탄은 모두 북극 빙하가 녹아서 온 결과라 한다. 기후 위기가 온 나라를 잠식해 들어왔다. 구멍 뚫린 하늘이 우울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염려는 곧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언 듯 파란
신과 맘몬을 구별하려면 그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제가 무엇인지 파악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니 글로벌 시장경제니 하는 말은 그냥 퉁쳐서 돈이 핵심이고, 세상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자본 이데올로기다. 많은 사람이 돈을 맘몬이라 여기는데 실상 ‘돈’은 그저 교환가치의 수단일 뿐 거기에 무슨 윤리적 가치나 힘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면, 돈을 절대적 가치로 욕망하고 숭배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리고 지켜내야 할 제1계명
대지의 주체는 농민이 아니었다. 그들이 흙에 입을 맞추고 하늘에 모든 것을 내맡기며 살아왔다 한들 주체는 늘 약탈자들의 몫이었다. 유사 이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자는 누구든 자기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없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가진 자가 주체다. 그래서 소작인이든 무산자든 대상으로서 소외된 삶은 단 한 번도 바뀌어 본 일이 없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본의 머슴이다. 그래서 머슴인 자는 이후 스스로의 삶에 주인이 되기 위해 농촌 대탈주를 감행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 이후 ‘농사나 짓겠다’거나 ‘농사나 지어라’와
교만은 가톨릭교회의 최고 악덕이다. 교만의 상징인 루치펠(루시퍼)이 인간계로 내려와 온갖 패악을 저지른 것은 그가 처음부터 악마여서가 아니다. 그는 제 이름처럼 천상계에서 가장 빛나고 잘나가던 천사였다. 그런 루치펠이 한순간 악마로 떨어진 것은 자신을 절대 권좌에 위치시켰기 때문이다. 교만은 흔히 알고 있듯이 으스대거나 잘난 체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루치펠이 부린 교만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신과 대지와 만물을 분열시키는 간교함에 있다. 루치펠은 영리한 지능의 소유자로서 상황을 조종하고, 세계를 끌어당겨 제 편으로 만드
예레미야가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았을 때는 요시아 왕이 한창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남유다 왕국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당시는 유다를 둘러싼 주변 열강들, 앗시리아와 바빌론, 이집트의 각축전이 치열하던 때였다. 유다는 어떻게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 애썼으나 왕과 백성의 눈을 가리는 자들이 차고 넘쳤다. 가짜 사제들, 가짜 예언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왕국은 고립되고 상황은 악화일로였으나 이들이 두는 훈수는 듣기 좋은 말 일색이었다: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325년)와 콘스탄티노플(381년) 양자 공의회를 거쳐 확정되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한 조목마다 이단에 맞서 신앙을 보호한 교회의 지난한 투쟁을 엿보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실체(ὁμοοὐσία)이며 동시에 세 위격(ὑποστάσις)을 지닌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체성이 달린 근본적 가르침이다
예수 승천은 ‘아버지의 뜻’이든 ‘하느님나라’이든 예수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을 연속시키기 위한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가 이룩한, 그러나 여전히 이루어야 하는 ‘하느님나라’는 그날 비로소 제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만일 승천이라는 단절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제자들은 예수의 아우라에 갇혀 더 이상의 성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거나 스승의 화려한 명성에 취해 체포와 구금, 고문과 사형으로 스러진 예수를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도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유혹으로 포장되었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들은 이래저래 예수
사랑은 매우 고약하다. 너무도 분명한데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다. 실제인데 잡히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언어로 표현하려 들지만 표현하는 순간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사랑은 채울 수 없는 고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을 내어 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사랑이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는 시지푸스의 시도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것은 중력 같은 것이어서 ‘너를 위한 것’이라 떠메는 순간, 자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왜 그럴까? 그건 사람이 본시 나빠
수 개월째 블랙홀이 되고 있는 코로나19 덕분에 바이러스에 대한 상식이 급증했다. 바이러스는 일단 '세균이 아니'라 하고, 그저 '불완전한 세포구조에 핵산을 둘러싼 단백질 껍데기'라 한다. 그러다 제1, 제2 숙주에 안착하면서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변해간다. 공식이 따로 없는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는 것인데, 특히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올 때가 그러하다. 물론 바이러스만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이 모든 원인의 배후에는 숲을 파괴하고, 수십억 동물을 공장식 밀집 형태로 사육하거나 학대해 온 인간이 있다. 또 하
코로나바이러스-19로 온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미증유의 사태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끝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재의 수요일이 오기도 전에 걸어 잠갔던 성당에도 봄은 오고 부활이 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공황 상태다.얼마 전, 유발 하라리 교수가 에 낸 기고문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 사태를 인류 최대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각국 정부들이 내린 결정들, 국경 봉쇄, 개인과 공동체간의 통제와 같은 다양한 측면들이 미칠 영향력에 대해 분석했다: “당장의 결정들이 위협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자가 그를 추모하며 겪는 아픔의 방식이다. 애도의 슬픔 밑바닥엔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이 깔려 있다. 사랑할수록 절망과 애도는 비례하고, 마침내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만 하거나, 혹은 받아들일 수 없거나 한다. 이런 애도는 반드시 죽은 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불가에서는 ‘생노병사’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애별리(愛別離)’를 첫째가는 고통으로 여겼다. 그만큼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은 사별 못지않은 슬픔을 동반한다.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관계의 경계에서 일어난다. 애도가
정현종의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만 오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가, 혹은 한 역사가 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수천만 년을 끌고와 내 앞에 서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인데 우린 그 사람을 놓치고 만다. 목마른 것을 제외하곤 어떤 공통분모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야곱의 우물’을 사이에 두고 무심히 오간다. 우리는 모두 가늠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세계를 끌고 오지만, 그 세계가 어떻게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는지는 짐작하지 못한다.야곱의
오늘 광야에서 받은 예수의 유혹은 앞으로 예수가 직면할 세계의 실체를 보여 준다. 예수가 받은 유혹에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근원적 욕구와 힘(권력)의 욕망이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나타나 있다. 악마는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악마는 한 인간이 처한 삶의 조건을 타고 약한 고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예수의 첫 번째 유혹이 사십 일간의 단식 후에 찾아왔다. 극도로 시장했을 때 유혹자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빵이 되게 해 보라고 부추긴다. 유혹자는 허기진 예수를 제대로 건드렸다. 그는 마치 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