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개신교 신자의 ‘마치 4박 5일간 꿈을 꾼 것 같았다’는 고백처럼 온 나라가 교황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울고 웃었던 감동의 도가니였다. 기어이 프란치스코 신드롬까지 남겼던 방한이었다.곳곳에서 울렸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예언자적 외침들그런 와중에도 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비행기 트랩에 오르는 순간까지 교황
현대사회에서 여가란 그 어원인 라틴어 ‘licere’나 그리스어 ‘Schol'e’의 고전적 의미처럼 노동이나 직무를 다한 후 허용된 자유시간 정도로 보던 종래의 소극적 의미에서 벗어나 오히려 ‘지금 여기’의 순간에 몰입해 즐기며 창조적 미래를 준비하고 재충전하는 생산적이고 역동적인 의미를 지
복음의 시작은 광야의 소리(마르 1,1~3), 평생을 광야에서 살았던 야인(野人) 세례자 요한은 그분에 앞서 복음의 길을 닦은 교회의 모태요 텃밭이었다. 공생활을 앞둔 예수께서 그런 광야의 사람을 굳이 찾아가 세례 받으시고,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에서 교회를 시작하신 것은 교회의 눈길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런 야성(野性)이 세속에선
언젠가 TV에서 ‘네 잎 클로버’만을 따로 재배·가공하여 액세서리로 만들어 국내시장만이 아니라 수출까지 하며 고수익을 올리는 농장을 소개하는 것을 보며 빙그레 웃음 머금었었다. 우리가 행운의 심벌로 여기는 ‘네 잎 클로버’야말로 사실은 장애를 지닌 이른바 ‘비정상적’ 클로버인 까닭
성당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가깝게 만나는 사람이 본당수녀들이다. 주임신부와 같은 사제보다는 더 친근하게 여겨져서이기도 하지만 우선 본당사목의 실질적인 총괄 관리자인 사제는 신자 개개인과 개별적 친목을 나누기 힘든 까닭도 있다. 본당 규모가 갈수록 대형화되면서 사제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사목보조자로서의 수녀 역할은 결코 그 중요성이 줄어들지
‘일단 저질러라. 그리고 밀어붙여라.’ 지난 2년여 MB의 국정 추진 방식은 늘 이런 식이었다. 80%가 넘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4대강 공사는 그 대표적 경우다. 아예 반대 자체가 불가능하게 말뚝 박아놓으려는 듯 철야작업에다 군인력까지 동원해 전광석화로 강행하고 있다. 일단 추진해놓고 나면 그만이라는 독선
불교에서는 삼세불(三世佛), 곧 과거불(燃燈佛, Dipakara), 현재불(釋迦佛, Sakyamuni), 미래불(彌勒佛, Maitreya)을 모시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 선재설, 나사렛 사람 예수, 재림주와 같은 예수상에 비슷하게 대칭된다. 그리스도 선재설은 그분께서 한 처음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으로, 교부시대의 성삼론·그리
이제는 벌써 아련한 꿈처럼 느껴지는 남북대화 시절, TV로 감동의 장면들을 보면서 ‘이왕 분단될 바에야 남쪽이 공산주의국가로, 북쪽이 민주주의국가로 서로 체제가 바뀌었더라면 오히려 좋지 않았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난다. 역사에 ‘만일’이란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겠지만
넌센스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최되는 기독교 평화기도회에 부시(George W. Bush, 1946~) 전 미국 대통령이 간증자로 초대받았다고 한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하여 소위 ‘테러와의 전쟁’으로 집권 내내 전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부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짓고 한
수경 스님이 모든 걸 내려놓고 속세를 훌쩍 떠났다. 세상을 등진 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 생명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싶어 안타깝고도 가슴 아프다. 지난 2년간 참으로 많은 이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대통령 취임 보름 전 발생했던 숭례문 방화참사는 그 전조였던가. 여섯 목숨이 불길에 갇혀 억울하게 타죽은 용산참사가 일어났다. 무자비한 공안통치의 발길에 채여
종철이의 죽음이 내 가슴에 말뚝처럼 박히며 그날 내게 신(神)이 내렸다. 우리의 종철이가 욕조가 달린 고문실에서 갖가지 고문에 못 이겨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그해 1월 어느 날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당한 것처럼 한없이 억울해 종철이의 사진만 봐도 눈물이 솟쳤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 종철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
큰 싸움은 끝났다. 오만과 독선의 바벨탑은 허물어졌다. 민심은 준엄했다. 그것은 선거혁명이었다. 비록 혁명의 진앙 서울·경기지역의 끄트머리를 끝내 잡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민심이 천심’임을 드러낸 거대한 반역의 드라마였다.민심은 지난 2년을 그냥 눈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MB가 자행한 배반의 정치를 똑똑히 보고 있었
나는 이중당적자이다. 민주노동당원으로 활동하다 잠시 사회활동을 접고 떠나있다 지난 해 다시 돌아왔을 때 당은 분열되어 있었고, 옛 동지들이 마침 모두 진보신당으로 옮겨가 있어 정서적으로 가까운 신당에 입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껏 민주노동당에 탈당계를 내지 않아 본의 아니게 이중당적자가 된 상태다. 굳이 민주노동당의 당적을 정리하지 않은 것은 옛정만이 아
5·18민중항쟁 30주년 ‘제18회 전국문학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은 5월의 햇살만큼이나 눈부신 연녹색 풍경에 차라리 눈감고 싶을 만큼 아득하고도 험난했다. 굽이굽이 넘어가는 재마다 얼마만한 핏빛이 어려 있는가. 아픈 역사의 상흔을 곳곳에 안고 있는 지리산을 가로지르며 가슴은 광주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먹
지난 4월 27일 그날의 명동성당은 우리들의 그 명동성당은 아니었다. 87년 그 해 6월, 민심을 거역하여 영구집권을 꿈꾸던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온 나라가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던 6월항쟁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그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공권력 투입해 강제해산하려는 정권을 향해 김수환 추기경은 “경찰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과 병자들에 대한 관점은 복음서의 치유기적들에서 드러나듯 당사자주의였다. 이는 최근 장애인운동의 주류이자 대세인 독립생활(independent living)패러다임에서의 장애당사자주의와 상통하는 것이다. 그분은 치유기적을 행하면서 치유대상자를 피동적 수혜자로 여겼던 기존의 소위 ‘기적의 손’ 치유자들과는 달리 현대
대구가 변하고 있다. 더 희망적인 것은 가톨릭 대구대교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4월 10일 4대강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낙동강 달성보 현장 강변에서 열린 ‘4대강 사업 저지 대구생명평화미사’에 참석하러 낙동강변로를 달려 강둑 위를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수백 명의 사제들과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총체적 위기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MB와 국방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어느덧 실체적 진실이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천안함 침몰 참사에 희생된 승조원들과 어민들, 그 유가족들이 처해 있는 참담한 상황은 지금 우리 사회의 어수선한 현실 그 축소판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어수선함 속에서 사회적 근본 토대가 급속도로 붕
동서고금의 여느 문화보다도 현대는 구조적으로 탐욕에서 비롯된 비축문화(備蓄文化)로 되어 있다. 맹목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절제를 모르는 축적(蓄積)에 대한 과도한 편집적 행위. 그것이 경제발전주의로, 군사력 경쟁으로, 신세계 환상주의 등으로 나타난다. 그 비축문화에서 집단이기주의와 빈익빈부익부, 심지어 끝 간 데를 모르는 퇴폐향락주의 등 현대사회의 모든
民은 약하다. 죽이려고 칼 휘두르면 꼼짝없이 죽고 만다. 그러나 지극한 그 수용성 때문에, 오히려 民의 한(恨)은 불길 되어 부활하고 만다. 몸은 죽으나 혼불은 더욱 충만하며 되살아난다. 불길로 화한 그들은 여기저기에 불 지르고 다니며 모든 권력의 칼을 녹인다. 그렇게 모든 쇠붙이가 녹아 사라진 뒤 民의 혼불은 다시 순수한 몸으로 나타나 새 세상을 낳는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