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통신 연재를 마치며해마다 칠팔월을 손님맞이철로 명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올여름은 유난히 많은 손님을 치렀다.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교사 연수차 오기도 하고, 시댁 식구들, 친정 식구들,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친구, 심지어 우연히 알게 된 버스 기사 아저씨(와 그 친구들)까지... 한 팀 치르고 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팀이 왔다. 일주일가량 오래 머물다 가기도 하고 하루 잠깐 있다 가기도 하고, 몇 달 전부터 약속하고 오기도 하고 느닷없이 오기도 하고.... 그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접속해 온 사람들을 맞고 떠나보내고
더워도 너무 덥다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이 여름의 일상을 꾸려 가고 있다.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 선선한 시간에 바지런하게 움직여 애들 아침 먹이고 개밥 주고 아침 운동, 그 다음엔 점심 준비를 하고, 빨래, 청소 같은 일들도 한다. 그러다가 오전 11시쯤 점심을 먹고 치우는데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는 시간이다. 애들이 땀을 줄줄 흘리고 있으면 얼른 샤워 한번 하고 오라고 한 뒤에 더운 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 긴 낮잠을 잔다. (너무 더워서 잠이 오냐고? 다행히 안방 바닥이 흙바닥이라 매우 차갑고 시원해서 낮잠 자리로는 그만이
날이 더워지면 아무래도 무슨 일이든 귀찮아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난주에 3박4일 동안 큰 손님을 치르고 났더니 그 뒤로 긴장이 확 풀리면서 평소처럼 뭔가 해 먹고 싶다는 의욕도 솟구치질 않고 적당히 때우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만약 집 가까이 밥 사 먹을 데가 있다면 너무나 쉽게 외식을 결정했을지도 모르겠다.오늘 저녁만 해도 호박된장국에 열무김치 있으니까 감자알조림이나 하나 더 할 요량으로 작은 감자알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때 앞집 할머니가 놀러 오셔서 "이 집은 뭐 해 먹고 살어?" 하면서 한참이나 반찬 없어서 밥 못 먹겠
봄부터 거의 매일, 빵을 구웠다. 빵만큼 지루하지 않은 간식이 없을 뿐더러 날마다 밥을 주며 발효종(빵 씨앗 요정)을 키우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정이 들어 '이제 그만 뚝!' 하고 내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발효종을 넣어 빵을 반죽하고, 한두 시간 기다렸다가 모양을 빚고 그게 또 적당히 부풀어 오르길 기다려 빵을 굽는 나날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발효종에 밥을 주고(먹이기) 저어 주며(놀아 주기) 지속적 관계를 맺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음은 물론이다.그러던 어느 날 신
나는 농사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적극 일에 뛰어들 형편이 아니다 보니, 알아서 잘하겠거니 신랑한테 믿고 맡기는 게 속이 편하다. 하지만 내가 굉장히 절박함을 가지고 달려드는 농작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구마! 시골에 살면 고구마가 지겹고 시시하지 않냐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 내 경우엔 시골에 살면서 비로소 고구마의 참맛과 가치를 알게 되었다.왜냐, 고구마를 심고 싶어도 심지 못하던 시절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합천에 살 때는 멧돼지 때문에
26개월이 된 다나. 이제 제법 말을 한다. 낱말 몇 개 조합하는 수준으로 하고 싶은 얘긴 거의 다 전달을 한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말로 일기라도 쓰는 듯이 며칠 사이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 주고는 하는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다나야 코, 콩, 아야, 아빠 후후후, 엄마아~ 애앵앵, 뽀빠 흥! 딱지, 다나야 코, 콩 없다, 엄마 야호!"이게 뭔 소리인가 하고 미간을 찌푸리는 분이 계실 것 같아서 그때 당시 상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되살려 보겠다.그러니까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완두콩을 한 바구니 따
살림하는 주부들이 곧잘 하는 생각이 '오늘은 뭐 해 먹을까?'일 것이다. 나 역시도 비슷한 고민을 품고 살아왔지만 점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왜냐,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곧 내가 먹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저녁 준비를 하기 한두 시간 전에 아무런 생각이 없이 일단 밭에 가서 쪼그려 앉는다. 어디에 앉더라도 할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정말 아무 데라도 자리를 잡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일을 하면 된다. 가령 딸기밭 앞에 앉았더니 딸기 포기 사이에 빽빽이 자라는 풀이 눈에 거슬린다고 치자
친정 엄마는 손이 아주 크다. 뭐든 만들면 넉넉해서 이 집 저 집 퍼 주고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 먹인다. 그런데 나는 엄마를 안 닮았다. 내 딴에는 넉넉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해 놓고 보면 양이 얼마 안 되는 경우가 많아서 반찬을 만들면 한 끼니 분량으로 똑 떨어지는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그때 만들어 싹싹 해치우니 개밥거리조차 잘 나오지 않는 형편인 것이다. 음식을 남기면 남긴 거 죽어서 다 먹어야 한다는데 남기는 게 없으니 죽고 난 뒤에까지 해야 하는 숙제는 없구나 싶어 홀가분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늘 안타까움이 있다. 나란
묵은 것보다 새것이 땡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묵나물(고구마 줄기 말린 거)이 있는데 꽁꽁 숨겨져 있으면 안 먹고 지나갈까 봐서 일부러 눈에 잘 띄는 부엌 칠판 앞에 떡 하니 걸어 두었다. 어서 먹어 치워야지 하고 말이다. 헌데 반찬거리가 없으면 새로 나는 나물을 찾아 들로 산으로 쏘다닐망정 묵나물은 외면하게 된다. 마을 할머니들이 첫째 둘째는 본 척 만 척이고 셋째 다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걸까? 아, 이제 막 돋아나는 것들의 싱싱함이여, 풋풋한 향기여!김치도 그렇다. 묵은지가 동이 날 때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집은 잘 못 먹고 살기로 유명하다. 아이들 한창 클 때 괴기(고기)를 많이 먹여야 하는데 안 먹인다고, 다른 건 몰라도 우유를 먹어야 빨리 클 텐데 우유 안 먹여서 애들이 잘잘하다고, 뭣이든지 잘 먹어야 하는데 왜 과자 같은 걸 안 사 주냐고.... 온갖 걱정을 다 듣고 산다. 걱정은 때로 비난과 조롱으로 이어지고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까지 찍힌 채 먼 마을까지 소문으로 날아다니기도 하는 모양이다."애들한테 아무거나 안 먹인다면서요? 종교가 뭐예요?""청학동에서 살다 왔다던디? 이슬만 먹고 산다믄서.
날씨가 따듯해지니 내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아침 운동을 마치면 몽땅 밖으로 튀어 나간다. 그리고는 손에 모종삽이나 호미 같은 거 하나씩 들고 땅 파기에 돌입, 멀쩡한 밭 여기저기를 후벼 파기 시작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이들 셋이 모여 앉아 땅을 파는 데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한 폭 그림같이 아름답다.'저 녀석들 이제는 알아서 잘 노는구나.' 싶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 이럴 수가! 자세히 보니 이건 좀 심하다 싶다. 밭에 땅굴이라도 팔 속셈인지 너무 깊이 파 들어가는 게 아닌가."야, 나무 뿌리
징그럽게도 추운 겨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면 모든 게 꽁꽁 얼어 버린 얼음 세상이 따로 없었으니까. 한번은 마시던 물컵을 부엌 식탁 위에 올려 놓았는데 30분쯤 지난 뒤에 나가 보니 어느새 얼어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온도계가 없어서 정확한 온도를 재 보지는 못했지만 냉동실에 들어가 있는 생선이나 부엌에 서 있는 나나 별반 다른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이렇게 추울 땐 사람도 겨울잠을 잔다면 얼마나 좋을까? 밥을 한꺼번에 든든히 먹고 몇 날 며칠 잠만 자다가 날이 풀려서 움직일 만하면 그때 일어나 활동
편집 담당 기자님 전화가 왔다. 번번이 원고 마감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은 터라 '뭐야, 벌써 마감일이 지났나?' 싶어 심장이 덜컹, 서둘러 달력에 눈길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작가님, 저 여쭈어볼 게 있는데요, 그 들기름 짜는 기계 말이에요...."기자님의 용건은 다행히도 마감 독촉은 아니었다. 내가 6개월쯤 전에 에 들기름 짜는 기계가 등장하는 내용의 원고를 썼는데, 그와 관련해서 아직까지 독자들의 문의가 많다는 거였다. 어디서 샀는지, 값은 얼마인지, 들기름을 짤 때
아침나절 절 운동 시간, 다나의 방해 없이 절을 하려고 밥상에 고구마 접시를 내놓았다. 계획대로 다나는 얌전히 고구마 접시 앞으로 접근했고 다울 다랑이와 나는 절을 시작했는데, 다울이가 자꾸 다나 쪽을 살피느라 절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다."어, 다나가 고구마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 다나야! 고구마 찌르지 마라.""야, 절할 때는 절하는 데 마음을 모아라. 다나는 내비 두고....""다나가 숟가락으로 이거 저거 찔러 놓으면 내가 못 먹게 되잖아.""괜찮아. 솥에 또 있으니까 걱정 마. 얼른 절이나 하자."그렇게
12월 20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생일인 줄도 모르고 아침인 줄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는데 신랑이 안방 문을 열고 말했다."얘들아, 오늘이 엄마 생일이다. 축하해 줘." (정작 본인은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부끄럼쟁이 같으니라고~)"어, 엄마 생일이야? 그럼 내일이 내 생일이네. 엄마, 축하해." (다울)"내 생일은 왜 안 와? 왜 내 생일만 늦게 오지? 오늘이 내 생일이면 좋겠다." (다랑)"야, 너는 엄마 생일까지 뺏어가려고 하냐? 정말 나쁘다." (다울)다울이와 다랑이 사이 실랑이를 뒤로 하고
메주야, 잘 뜨고 있니? 나는 서울에 잘 도착했다. 네가 뜨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해 서운하구나. 하지만 아이들이 네 곁에 있으면 네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피난을 온 거란다. 지난해에도 메주 띄운다고 메주를 아랫목에 두고 지내던 며칠 동안 참 많은 일이 일어났거든. 다나가 파 먹고, 다랑이가 뒤로 넘어져 으깨고, 다울이가 걷어차고.... 올해는 아이들이 없으니 너는 처음 모습 그대로 무사할 줄로 안다.물론 속으로는 많은 일을 겪어 내고 있겠지.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네게 달려들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네가
해남에 사는 지인이 자연물로 드림캐처 만드는 수업을 연다고 해서 꼭 가고 싶었다. 한데, 날은 춥고 해는 짧고 신랑은 그 먼 데까지 뭣하러 가느냐며 핀잔이나 준다. '치, 할 수 없지. 그럼 나 혼자 애 셋을 다 데리고 가 보는 거지 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궁리를 해 본다. '버스정류장까진 택시로 움직인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데 두 번 갈아타야 하니까 각각 세 번씩, 도합 여섯 번은 버스를 타고 내리고 해야 한다. 다울이는 알아서 잘할 것이고 다랑이는 내가 도와줘
어떤 이는 설거지만으로도 넌더리를 치며 식기세척기 예찬론을 펼치지만 난 설거지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밥 먹고 나서 그릇 쌓아 두는 일 없이 그때그때 씻으면 부담스러운 일감으로 다가오지 않고 밥 먹기 전에 손 씻는 일마냥 자연스럽다. 헌데, 싱크대 수채 구멍 청소하기만은 언제나 심호흡을 부르는 괴로운 일감이다. 수채 구멍에 달라붙어 있는 괴물의 살점 같고 지독한 콧물 덩어리 같은 물때.... 눈으로 보는 것만도 역겹고 만지기는 더더욱 싫다. 하지만 나 아니면 누가 치우나.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를 악물고 깨끗이 씻어서 해
어느 회보에 실린 글에서 학교를 뜻하는 낱말 '스쿨'의 어원이 '여가'를 뜻하는 '슐레'에서 왔다는 얘길 듣고 무릎을 쳤다. 그렇다. 진정한 학교는 '마음껏 풀어 놓음'을 통해 시간의 느슨함을 온전히 누리게 할 때 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우리 집 아이들(어떤 날은 아랫마을에서 놀러오는 유민이까지)을 보면 정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스스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 뭐 하고 놀까?"로 기획되는 이 학교는 놀 거리를 잘도 찾
"우리 집 암탉이 알을 낳았어요!" 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럼 암탉이 알을 낳지 수탉이 낳나?" 하며 시큰둥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거 그림책 제목 아닌가요?" 하고 못 미더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 이 말 자체가 워낙 현실감 없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달걀이 상품이 된 뒤로 암탉과 달걀을 연결짓는 사고 자체가 붕괴되었으므로.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2주 정도 전부터 우리 집 암탉 한 마리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알 낳아?" 하고 물어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