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추적! 공자’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한 것은 작년 3월이었다. 원래 6개월만 연재하려고 했던 것인데 두 번이나 연장을 하여 결국 1년 6개월을 연재하게 되었다. 횟수도 모두 39번이나 된다. 개인적으로는 공자에 관한 나의 두서없는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처음 한상봉 주필(당시 편집국장)과 만나 집필 방향에
어떤 한 정신이 높은 진정성을 바탕으로 자신을 구현할 경우 후대의 정신이 그에 젖줄을 대고 발전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서양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철학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지 않는가.논어에 깃든 공자의 정신이 또한 그렇다. 공자의 정신이 가졌던 너무나도 높은 진정성은 후대의 여러 정신들이 보여주는 다양성과 특징들에 대해 원천적(源泉的)
언젠가 공자는 제자 안연을 칭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쓰면 행해지고 거두면 간직된다’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갖추고 있구나!”(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7/11겉보기로 보면 이 말은 특별히 어려운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들여다보며 생각을 거듭할수록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용지
백이숙제는 동양의 정치학적 상상력에 있어서 무한한 원천이 되는 사람들이다. 사마천의 이 ‘백이열전’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그들은 주나라가 건국되던 기원전 1046년에 이미 노인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100년 전의 사람들로 그들을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부각시키는 데에 누구보다 결정적 역할을 한 공자(기원전
일전에 어느 공공도서관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논어 강의를 의뢰받은 적이 있었다. 승낙을 해놓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강의일을 삼사일 앞두고 연락이 왔다. 강의 대상이 일반 주민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이라는 말이었다. 도서관 직원이 새로 전입을 와서 자기도 성인 대상인 줄 알았는데 확인해보니 초등학생이더라면서 강의가 가능하시겠냐고 물었다. 다소 황당했지만 취
누가 논어를 배운다고 하면 무엇보다 선생이라는 사람이 칠판에 한문을 써놓고 읽은 다음, 그 한문을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해 가며 뜻풀이를 하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논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은 어디나 비슷한 모습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나 역시 그렇게 논어를 강론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그 방법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
논어의 형성에는 여러 사람이 기여했다. 주인공인 공자는 당연히 결정적 역할을 하였지만 단지 공자의 기여만으로 논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공자의 말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제자들이 있고 또 그것을 여러 개의 편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엮은 편집자가 있다. 나는 문헌으로서의 논어를 이야기하면서 가끔 이 세 기여자들―공자와 기록한 제자들과 편집자―에 대해 다음과
논어라는 책, 공자라는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길게 잡으면 35년, 짧게 잡아도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래도 이 진귀한 문헌에 기록된 말들의 진의를 찾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하든 나는 그 진의를 찾는 일에 있어서 적어도 상대적으로는 누구보다 많은 진척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언제부터라고
만약 용한 점쟁이의 세속적인 관점에서 공자의 일생을 점쳐 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공자의 인생은 결코 성공적인 인생으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고 중년을 넘어서는 자신의 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는 것이 그의 사주팔자일 것이다. 방황 십
김우창 교수는 어떤 대담에서 "의로운 사회보다는 어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연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인의예지(仁義禮智)라고 할 때 ‘인’이 위고 ‘의’가 두 번째로, 인이 더 위에 있는 것이지요. 기독교에서도 정의를 중요시하지만 더 중요한 게 사랑이고, 불교에서도 진리를 존중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자비지요. 인간의 많은 문제는 부분적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지속적으로 주목해온 역사의 인물이 있다면 바로 예수와 공자였다. 또 관념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일정 수위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준 책이 있다면 그 역시 와 였다.물론 나의 주관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주관적인 얘기일 뿐이라 하더라도 할 말은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해 그 두 인물과 책은 이미 역사적으로 정평이 난 인
는 노(魯)나라의 역사책이다.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B.C. 722)부터 애공(哀公) 14년(B.C. 481)까지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는 비록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는 하나 단지 노나라만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니고 노나라를 둘러싼 여러 제후국들과 주 왕실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세계
논어 술이편 제16장에 보면 묘한 수수께끼 하나가 제기되어 있다. 제기만 되어 있을 뿐 답은 주어져 있지 않다. 답도 단답형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수학의 공리 증명처럼 어떤 천재가 어느 순간에 드디어 답을 찾았노라고 선언할 만한 그런 수수께끼도 아니다. 그러니 구태여 말하자면 까마득한 미래를 향해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수수께끼인 셈이
크릴(H. G. Creel)의 저서 는 우리나라에서 제법 많이 읽힌 책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책을 즐겨본 것은 주로 그 시각의 색다름 때문이었다. 크릴은 서양 사람이었기 때문에 무얼 봐도 자신의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의외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논어와 공자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배경시대인 춘추시대와 그 시대를 포괄하고 있던 주(周)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나라가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기원전 1046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점은 주나라가 건국한 시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중국의 역사시대가 개시된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 은나라가 있었다. 은나라에 관해서는 등에
예수의 짧은 생애에 걸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주변인은 누구일까 하고 묻는다면 답은 조금씩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세례자 요한을 거명하지 않을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 활동을 전개했고 예수는 그의 활동을 남달리 주목했던 것이 사실이다.잘 알다시피 세례자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고고히 죄의 회개를 외치던 사람이
논어를 읽다 보면 누구나 각별히 마음에 드는 단편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각자가 명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객관적으로 가장 뛰어난 단편은 아닐 것이다. 몇몇 사람들로부터 “나는 이것이 최고의 단편이라고 생각한다”는 선정 결과를 들어 보았지만 저마다 달랐다. 그 결과를 놓고 보면 오히려 왜 그 사람이 그 단편을 선정하
오랜 기간 논어를 읽고 나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외람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정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십년, 삼십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친 변화이니만큼 거기에는 세상살이의 경험 등 다른 변수도 작용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를 보는 구도(構圖)라고 할까, 원근법이라고 할까 하는 것은 확실히 논어로부터 얻은 것이다.논어에는 적지
관중은 공자와 같은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동시대인은 아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고 관중은 대략 기원전 715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공자에게 있어서도 관중은 이미 역사 속의 인물이었다. 춘추시대가 낳은 역사적 인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단연 공자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관중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왕도 제후도 아닌 일개 대부
정명(正名)이라는 말은 논어에 단 한번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단 한번 나오는 이 말로 인하여 정명론(正名論)이라는 말도 생기고 정명사상(正名思想)이라는 말도 생겼다. 전국시대에는 명가(名家)라는 학파도 있었는데, 기록된 바는 없지만 역시 공자의 이 말에서 비롯된 학파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중용(中庸)이라는 말도, 성(性)이라는 말도, 어짊[仁]이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