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효과’라는 말이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풍선 한끝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푼다. 가운데를 누르면 양쪽이 다 부푼다. 풍선이 터지지 않는 한, 공기의 양이 달라지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눌리면 반드시 다른 쪽이 부푼다.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흔하다. 일정한 수요가 있는데 이를 어느 한쪽에서 억압하면 사라지지 않고 다른 쪽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이런 것이다. 한국 종교에도 이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종교 수요는 일정하다한국 종교를 연구하다 보면 이해가 어려운 현상이 하나 있다. 한국은 종교 자유가
요즘 집에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이 아름다운 시기에 대한 모독인 것 같다.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두를 숨가쁘게 달리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잠시 잠깐 밖에 나와 거리를 걸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거리의 나무와 그 잎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지를. 내가 사는 알라미다는 밤에 산책을 하다 보면, 꽃향기가 내 걸음을 붙잡는다. 그래서 향기 나는 곳을 따라가 보고, 또 어둠을 환하게 비추는 꽃잎을 보다, 또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다, 그렇게 온밤을 꼬박 걸어 보고픈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부활시기를 보내
요즘 같은 시대에 뭐라도 해 보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종교가 이 시대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설득하겠다 하니 지인들로부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대충 이런 반응이었다. ‘뭐 새삼스레 그러느냐 그냥 조용히 살아!’ ‘잘될 것 같지는 않은데 네가 하겠다 하니 응원은 해 주겠다!’ ‘애쓴다!’ 예상한 대로였다.종교에 대한 냉소와 비관그동안 종교인의 한 사람, 한 종단의 신학자로 살아오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은 종교인 스스로 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원인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비롯하는지 아니면 다른 종교인에 대한
어려서 세례를 받은 이후, 햇수로는 적어도 5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학 공부에도 제법 시간과 공을 들였고 신앙과 관련된 곳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평범한 신앙인이라면 접하기 쉽지 않은 정보들과 여러 종교인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 수십 년 동안 배운 내용의 핵심을 간략히 요약한다면, 하느님은 자연을 포함한 물질세계 안에,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비천한 모습 안에 숨어 계시다는 것, 우리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 침묵으로 말을 건네신다는 사실이다. 가난과 고통은 배척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의
요즘 사전 약속 없이 오는 손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 살아가는 방식들이 너무 정교하고, 또 계획 되어서, 불쑥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하게 된다. 설사 예고하고 오더라도, 손님맞이를 위해서는 아무리 가난한 대접이라고 해도 무언가 분주해진다. 우선 시간을 비워 놓아야 하고, 또 손님이 좋아할 만한 장소도 물색해야 한다. 손님이 오는 기간은 특별한 시간이니, 청소도 더 신경 쓰게 되고, 그렇다. 그러니 이 바쁜 세상에 누구를 찾아가는 일도, 누구를 맞는 일도 작은 일은 아니다. 게다가 그 손님이 가지고 오는 소식이 영 반갑
그동안 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참으로 변하기 힘든 것이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 제도도 제도지만 종교 영역에서 종교인이 보이는 보수성 때문이다. 여기서 보수성은 익숙한 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속성을 가리킨다.변화에 저항하는 종교인의 보수성2010년 에서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5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아마존에 사는 부족들에 관심이 있어 본방을 사수하였다. 어느 편에선가 턱 밑 살갗을 뚫고 나무를 끼우고 사는 ‘조에족’이 나왔다. 피디가 조에족에게 물었다. “왜 나무를 턱 밑에 끼우고 사는 겁니까?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리스도교 역사는 번역과 편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 처음에 계셨던 말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던 그 말씀은(요한 1,1) 육화라는 인간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시발이었던 말씀의 육화 이래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목격 증인인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복음서로 번역되고 편집되었다.이후 교부들이 그리스도교의 삶과 사상을 이끌었다. 교부들은 히브리 성서의 고대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하느님 말씀을 이해
환호도 비관도 하지 말아야 한다!2023년 4월 챗지피티4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이 기술이 보여 준 효능과 기술 공개와 동시에 나타난 문제점을 개발자들이 몇 달 만에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 주어 큰 화제가 되었다. 최소 10년 이후에나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던 기술이 빨리 나타난 점, 문제점을 보완하는 속도도 몇 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불과 몇 달밖에 걸리지 않아 관계자들을 흥분시켰다. 그러자 언론과 얼리 어댑터들은 이 신기술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빠르게 바꿔 놓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언론이 떠든 정도
요즘 이상 기온이 아닌 곳이 별로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에도 폭우가 쏟아졌다. 늘 단단한, 그래서 모든 것을 지탱해 줄 것 같은 대지는, 너무 그렇게 근거 없이 믿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듯했고, 가로수가 뽑혀, 주차해 좋은 자동차 위로 무너져 내린 집도 있었다. 우리 동네는 다행히 전기가 나가지 않았지만, 여러 동네에서 며칠 동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춥게 지내기도 했다. 비가 계속 내리기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뭄으로 바짝 마른 나무들이 좀 해갈을 한 표정일까 살펴보러 나가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무
챗지피티4(ChatGPT)가 출시되면서 인공지능 열풍이 일고 있다. 써 보니 환호할 만큼 성능이 경이롭다.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도 제57차 평화의 날 담화 제목을 ‘인공지능과 평화’로 삼았다. 그러면 이 놀라운 인류의 성취는 우리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마침 써 놓은 글이 있어 독자들과 나누려 한다. 먼저 내가 2017년 '한국그리스도사상'(제25권)에 실었던 논문 '제4차 산업혁명시대 정보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부를 소개한다.1) ‘데이터 종교’다. 이에 이어 두 차례에 걸쳐 ‘인공지능과 종교’를 연재할 것이다.
교회 전례나 행사 중에 사제나 주교로부터 “형제자매 여러분”이나 “교형자매 여러분”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름다운 호칭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는 나를 형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신앙인들도 서로를 흔히 형제님이나 자매님이라고 부른다. “여러분의 선생은 한 분이요 여러분은 모두 형제들”(마태 23,8)이라는 예수의 말씀과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인간의 언어에서 형제나 자매보다 아름다운 말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으니 그 제자들이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
한국에서 종교를 선택하는 이들은 특정 종교에 몰리지 않고 여러 종교로 분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적 신뢰도가 가장 높은 종교가 새 입교자를 독점할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최근 상황이 달라지긴 했지만 천주교는 10년 전만 해도 사회적 신뢰도(한국 사회에 가장 믿을 만한 종교)에서 한국 종교들 가운데 늘 1위를 기록하였다. 그것도 늘 2등과 큰 격차를 보였다. 이때는 천주교가 독점은 아니어도 다른 경쟁 종교들에 비해 많은 신자를 얻었다. 최근 이뤄진 조사를 보면 천주교는 사회적 신뢰도에서 몇 년째 불교에 밀려 2
1월은 내게 좀 당황스럽고, 낯선 달이다. 새롭게 쓰는 2024도 어색해, 자꾸 작년의 어느 날이고 싶은 그런 착각에 시달린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세상은 너무 혹독해서, 그리고 여기저기 들리는 마음 아픈 소식들 때문에, 새해에 거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쉽지 않다. 새해 소망이 그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든가 아니면, 새해에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든가 하는 세상에서, 새롭게 가지는 소망이라는 말이 무색한 것 같기도 하다. 발터 벤야민은 무언가 세상적인 희망이 좌절되는 시간, 하늘나라에 대한 무력한 소망이 극대화되어, 변화를 일으키는
과거에 읽은 어느 신부님의 글이 가끔씩 내 마음에 떠오른다. 그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항상 백 프로의 힘을 쓰며 살 수는 없다는 것. 그랬다간 오래지 않아 지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소에 80프로의 힘으로 생활하다 백 프로가 필요할 땐 그 힘을 쓰고 일이 끝나면 다시 80프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항상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요구받는다. 요샌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 어릴 땐 모든 초등학교 아이들의 목표가 서울대였다. 당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위 1퍼센트에 들어가야 했는데 100대 1의
종교에 입문하려는 이의 동기는 대체로 그가 바라는 바와 일치한다. 누군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종교에 입문했다면 이 동기가 대체로 그가 종교에서 바라는 내용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물론 한두 가지 동기가 전적으로 입교를 결정하지 않고 또 바라는 바의 전부도 아니다. 그 동기와 바라는 바도 그야말로 대표적인 것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대부분은 자기 마음을 움직인 내적 동기를 잘 모른다. 이런 동기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눈치를 채는 경우가 흔하다.‘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데 지난 칼럼에서 새 신자의 가장
인생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 이들은 어디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과거 이런 이들은 제도 종교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 가운데 가장 진지한 이들은 출가(또는 성직)의 길을 선택하였다. 요즘은 어떨까? 아마 요즘은 이런 이들이 먼저 유튜브를 검색할 것 같다. 자신(이나 자기 단체)의 생각을 널리 알리고 싶은 이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벌이는 곳이 이 공간이니 말이다.그러면 여기서 해답을 찾고 이 해답을 심화(강화)하는 일도 가능할까? 지적인 면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답을 체화하는 일은 철저히 몸으로
오늘부터 매달 네 번째 금요일에 '나를 향한 신학'을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비판적 신학 에세이로, 우선 '나'를 위한 구원적 글쓰기에서 '수많은 다른 나'에게도 조금이나마 생각거리를 던져 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강창헌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놀 만큼 놀았다. 먹을 만큼 먹었고 마실 만큼 마셨으며, 헤맬 만큼 헤맸고 아플 만큼 아파도 보았으니 이제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나이쯤 되면 노장이나 요한계 문헌, 또는 경지에 이른 영성가
오늘부터 매달 두 번째 월요일에 '신학 오디세이아 3'을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글로벌 시대의 인간성 회복을 꿈꾸며, 때론 낯설고 때론 사소한 일상에 깃든 생, 시간, 그리고 하느님나라에 대한 조그만 영적 단상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집필해 주신 박정은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인생의 어느 계절이 되었든, 여전히 대림은 설레고 또 아름답다. 우리 동네 오클랜트 한인 성당 제대에 꾸며진 아주 소박한 대림환을 어린이들과 함께 바라보면서, 이 순간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아름다운 대림의 추억으로 마음에 새겨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
오늘부터 매달 두 번째 월요일에 '종교 전망대'를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새롭게 나오는 종교 관련 통계, 조사 결과, 빅 데이터를 분석하여 한국 종교의 현재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집필을 맡아 주신 박문수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많은 신자(신도)가 소속 종교를 떠났다. 이탈자가 많은 곳은 1/3, 적은 곳은 1/4정도 떠난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이탈이 코로나 팬데믹이 주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팬데믹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오늘부터 매달 두 번째 금요일에 '현 신부의 이거나 저거나'를 연재합니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우리네 삶에 풍요로운 선택이 있음을 사목 단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집필해 주신 현우석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혹자는 정답은 없지만 모범 답안은 있다고 하는데, 나 학생 때 정답을 모범 답안이라고 바꿔 부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게 그거인 것처럼 느껴진다. 암튼 정답이 없다 함은 확답이 없다는 얘기인데 일견 수긍하면서도 살아오면서 더욱더 정확한 답을 찾아내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를 썼던 나 자신을 떠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