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내려와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지난주는 여러 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가운데 눈과 우박까지 내린 한 주였습니다. 그간 날이 따뜻해 걷기 좋은 날씨였는데 바람이 많이 부니 그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바람을 등지고 걷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설렘 가득 안고 들어간 우도에선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아 이틀을 머물게 되었고, 비옷을 입고 걸으러 나선 길에선 제주의 매서운 바람을 제대로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씨 변화 속에서 만난 추위와 불편함 안에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의 배려로 올레길
안식기 중 올레길을 걸으러 제주도에 내려왔습니다. 걷는 것이 기도가 되고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시간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걷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궁극엔 생각도 비우고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소비적인 삶과 바쁘게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쉬 지치고 생각할 여유를 잃게 됩니다. 생각할 힘을 잃게 되면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십상입니다. 평소 걷는다는 것이 비우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길 위에 선다는
요 근래 몇 차례 많은 비가 오더니 그 무덥던 여름 더위를 씻어 갔는지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한낮의 햇빛은 강하고 햇볕도 따갑지만 어김없이 계절은 또 다른 계절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마치 일상이 그렇듯이 계절도 오고 가는 많은 빛과 어둠을 살아내는 가운데 흐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하늘도 점점 높아지고 논에서 벼들도 노랗게 익어 가고 있습니다. 양평도 친환경 농업으로 유명한 곳이라 양평군에 속하는 매월리 논에서도 여름 내내 다양한 논생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 괴산에 살 때 하늘지기
1993년 우리 정부(국방부)가 추진했던 FX사업은 공군 전력을 보강하는 차기 전투기(FX: Fighter eXperimental) 도입 사업으로, ‘전투기 120대를 구입하는 대형 사업’에 세계 굴지의 군수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한국이 처음으로 개최한 ‘1996년 서울 에어쇼’(서울 항공 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에는 FX사업에서 ‘돈 냄새를 맡은 군수업체들이 홍보에 열을 올리는 각축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로 FX사업은 우여곡절 끝에 60대만 수입하기로 결정, 그에 따라 2
날씨가 정말 덥습니다. 점점 더 극심해지는 폭우와 폭염으로 기후 위기의 심각함을 체험하고 있는 가운데 늦은 밤까지 가시지 않는 더위로 밤잠을 설치며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더위를 잘 이겨내는 일도 만만치 않아 하루가 고단하게 느껴지는데, 여러 뉴스도 갈수록 더 크고 무거운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부끄러운 정부의 행보들과 학생, 교사, 학부모를 둘러싼 교육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장애, 빈곤, 노동 현장과 주택 문제 등 사회적 약자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 혐오와 불신이 더 크게 확산하고 대낮의 흉기 난동 등 흉흉한 사건들
두 주를 넘게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무섭고 또 무겁게 내리는 비로 인한 안타까운 비 피해 소식과 사고 소식 중에도, 일상은 여전히 여러 일들로 비워지고 또 채워지기도 합니다. 제가 있는 곳도 장맛비가 많이 내려 산사태를 주의하라는 안전안내문자를 수시로 받기도 하고, 계속된 비로 인한 안전상의 이유로 며칠간 기차 운행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대가 높은 곳이라 큰 위험은 없었습니다. 지대가 높아 안전함을 느낄수록 자연히 반지하에 사시는 분들이나 지하상가 등 장맛비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된 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더 자주 기억하며 기도하게
저는 올 6월부터 서울 근교 농촌 마을에서 7개월 간 안식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안식년, 안식 학기라는 말은 사제나 수도자, 대학 교수, 드물게는 직장인들이 갖게 되는 특별한 멈춤과 쉼, 재충전 시기를 일컫기도 하는데, "천주교 용어 자료집"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7년마다 토지를 쉬게 할 목적으로 정한 제도”로 “토지가 하느님의 소유라는 개념에 근거한다”고 합니다. “안식년에는 경작지에서 자생적으로 맺힌 열매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 되게 했으며, 빚도 탕감”해 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 안식년 전통이 사람뿐 아니라
며칠 전 공동체에 함께 사는 수녀님의 어머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수녀님의 어머님은 결혼 후 첫 아이로 아들을 낳으셨는데 예닐곱 무렵 병에 걸려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결국 아들을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태어나기 오래전에 있던 일이었기에 어린 나이에 죽은 오빠의 존재에 대해 수녀님은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하신 뒤 점점 정신이 흐려져서 딸인 수녀님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되셨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가려면 저기 일곱 살배기 아이 좀 데려다 놓고 가"라고 말씀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엄마,
2023년 4월 18일 시청에서 있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에 참석하기 전 혼자 조용히 이태원 참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10.29 이태원 참사 기억의 길을 시작하는 곳 벽면엔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쓴 기도와 안부를 묻고 인사를 전하는 포스트잇이 가득 붙어 있었는데, 그 벽 위에 쓰여 있는 “기억은 힘이 셉니다”라는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기억은 무언가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2014년 4월 16일은 성주간 수요일이었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
제가 일하고 있는 곳의 이름은 ‘청년 공간 바라’입니다.새로운 소임지에 파견되어 일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어려웠던 일은 이곳의 이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계속 불리게 될 이름이니 심혈을 기울여서 지어야 했습니다.제가 속해 있는 성심수녀회 창립자 수녀님의 이름을 따서 ‘소피 바라 센터’라고 지을까 고민도 해 보았습니다. 좀 더 좋은 이름이 없을까 한 달 넘게 고민하던 중,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수녀원에서의 긴 시간 안에서 알아들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젊은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 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기나의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다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기그 사람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최근 많은 기관과 수도회에서 청년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세대로 지칭되며 여러 방법으로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어른들의 수고가 대단하지요.저 또한 새롭게 주어진 소임은 청년들을 만나는 일입니다.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습니다.처음엔
매년 이맘때쯤이면 수북한 성탄 카드에 꾹꾹 눌러쓰는 손글씨로 인사를 전하는 것이 한 해의 마지막 행사였습니다.언젠가부터는 이메일로, 또 언젠가부터는 더 쉽고 빠른 메시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편한 안부 인사에 더 익숙해졌습니다.혹여 제 마음도 그렇게 빠르고 가벼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1월부터 새로 시작한 일을 자리 잡는다는 핑계로 올 연말에는 많은 분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한 채 성탄이 지나가 버렸네요.“스노우볼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아요.”눈이 펑펑 오던 그날, 창밖을 한참 쳐다보던 친구가 제게 던진 한 문장이 마음에
우리가 종종 표현하는 “힘들 때”는 언제일까요.몸이 힘들어도 재미있는 일이 있고, 마음이 힘들어도 뿌듯한 일이 있습니다.내가 보기엔 힘들어 보이지만 즐겁게 지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그렇게 본다면 “힘들다”라는 표현은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많은 사람이 여러 다른 상황을 같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힘들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공통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인가 봅니다.“힘들다”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정의해 본다면,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 산란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산란해지는 마음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장 29절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라는 말. 들을 때 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다짐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바쁘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무엇이 있다면 혹은 무엇이 없다면 이 바쁨을 멈출 수 있을까요? 혹여 빠른 인터넷 때문일까요? 가끔은 빠르게 돌고 있는 팽이들이 가득한 운동장 한가운데 혼자 멈춰 있는 느낌을 받고 누구보다 더 빨리 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저 자신을 만나기도 합니다. 최근, 누군가의 부탁에, 누군가의 질문에 바로
소셜 미디어 사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시 로그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종종 ‘몇 년 전 오늘’ 제가 올렸었던 사진이나 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최근 우연히 ‘9년 전’ 제가 올렸던 어떤 사진 한 장이 이런저런 일로 마음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제 눈에 덜컥 띄어 버렸습니다. 혹시 학창 시절 큰 맘먹고 시작한 책상 서랍 정리 중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진이나 편지를 발견하고 추억에 잠기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 당황하신 적이 없으신가요? 저는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옛 사진이나
“Hi, nice to see you, my name is Younghye Yu. Just call me Miriam.”(안녕하세요. 제 한국 이름은 유영혜인데, 그냥 미리암이라고 불러주세요.)잠자는 시간 빼고 한국어만 쓰는 우리의 언어 환경에서 꾸준히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영어 환경에 노출하는 기회를 규칙적으로 갖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늦깎이 교육대학원 학생이 되어 갑자기 원어민 교수의 수업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민망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민망함에는 점차 익숙해지지만 도무지 영어 실력은 늘
영화 ‘영광의 탈출’ OST의 웅장한 오프닝 음악으로 시작되는 오래된 TV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나요? 아마도 첫 멜로디를 들으면 자동적으로 “아 그 프로그램?” 하며 저와 같은 추억이 소환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주말의 명화'입니다.모 방송사에서 주말마다 엄선된 영화를 방영해 주었는데 찾아보니 40여 년의 장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릴 적, 비디오 가게에서 테이프를 빌리는 수고 없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던 매주 토요일 늦은 저녁 시간, 지금처럼 원하는 때에 원하는 영화를 쉽게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았던 시
이곳 시카고 수녀원으로 옮겨 온 뒤 한 달쯤 되었을 때 저는 매우 생소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시카고 지역 뉴스를 읽다가 제가 다니던 거리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서 열댓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부상을 입고 실려 갔다는 소식을 보고는 놀라 공동체에 나누었더니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오신 할머니 수녀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일은 너무 자주 일어나는데 많이 놀랬지?”라는 아주 평범한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영어로 설명을 잘 못했나 싶어 다시 열심히 말씀드렸는데도 “응 네가 많이 놀랬겠다.... 조심하고 다녀”라고 말씀하시며 오
최근 로마에서 열린 국제 여성수도자 연합회(USIG) 총회에 참석하고 오신 공동체 수녀님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총회의 큰 주제는 여성 수도자들이 어떻게 시노드의 여정을 살아갈 것인지 서로의 의견을 듣고 논의하는 시간이었고, 이를 위해 총회 전에 사전 질문을 각 나라의 수도회들에 보내어 수합하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두 가지인데, ‘지금까지 우리는 시노드의 여정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지금 이 순간, 성령의 움직임은 우리 교회를 어디로 초대하고 있는가?’입니다. 각국의 수도회에서
최근 공동체 수녀님들과 함께 본 영화 한 편을 나누고 싶습니다. 영화 제목은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때’(When love is not enough)입니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치유모임인 A.A를 시작한 빌 윌슨의 자전적 이야기로, 공동체 수녀님들이 ‘중독’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함께 시청하게 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빌이 사랑하는 아내의 지속적인 헌신을 통해 변화하고 치유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치고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빌은 자신이 더 이상 스스로 알코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