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6,13-28 참조).그리고 며칠이 지난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예비자 교리 시간에 혹은 교우들에게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냥 신비라고 하기에는 인간의 이성이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하고, 그렇다고 명쾌하게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으려고 하지만 아쉽습니다. 이럴 때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있는데, 그 태양에서 빛이 나오고, 열이 나오고, 그리고 전파가 나온다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교회는 주님승천대축일을 지냈습니다. 이제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의 시대를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은 역사의 여정을 순례한다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라는 바람을 밝힙니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게 해달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민족의 구원과 해방을 갈망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했습니다. 5월엔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도 있으며,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고맙고 귀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특히 올해 5월은 더욱 그렇습니다. 많은 어른들이 자녀들 앞에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스승들 역시 제자들 앞에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자주 생각하고 성찰하는 물음입니다. 성경을 신앙과 교회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의 바탕으로 삼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말로 주님이라 하고 ‘그리스도’라고 부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호칭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적어도 ‘주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려면 그에 맞
우리 교회는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지냈습니다. 그렇지만 슬픈 부활입니다. 그냥 슬픈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아픈 부활입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사람을 ‘고아’라고 하고,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과부’ 혹은 ‘홀아비’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 있지만, 자식을 잃은 사람을 일컫는
슬픈 부활!우리는 슬픈 부활을 지내고 있습니다. 기쁨의 축제를 지내야 할 이 시기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부모, 형제, 자식을 잃은 가족들,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가족들, 악조건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바다 속을 오가며 ‘생명’을 찾으려는 그 많은 사람들,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 기꺼이 동행하는 많은 봉사자들, 그리고 그 소식을 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미사에서는 수난 복음(마태오)을 듣습니다.우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보인 태도를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물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수석
“너는 행복하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이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7-18)“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23) 스승 예수님께서 같은 제자 베드로를 두고 하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성과 사회성의 황폐화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 다니는 길에, 혹은 돌 잔뜩 있는 곳에, 혹은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누굴까요? 벼를 보고 쌀 나무라고 하는 도시의 극소수의 아이들 빼고,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알 것입니다. 씨를 뿌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를 수 있어도, 적어도 뿌리지 말아야 할 곳, 혹은 뿌릴 필요가 없는 곳이 어디라는 것쯤은 말입니다.그런데 성경에는 씨 뿌리는 사람이
철도 문제에 대해서 정부와 노동조합 사이에, 더 나아가 국민들 사이에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맞선다기보다는 어쩌면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엊그제 보도를 보니 코레일이 노동조합에게 몇 십억에 해당하는 소송을 제기했다고 하니 주눅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가 정부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가 불법이므로 엄단하겠다고 하니, 어찌 첨예하게 맞선다고 하겠는가. ‘맞선
“자신을 위해서만 부를 소유하는 이는 죄를 짓는 것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다.”(간추린 사회교리 329항)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46항; 간추린
지난 글에서는 요한 복음(9,22; 10,38-39; 11,47-50)을 묵상하며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을 한국 교회에서 본다’란 제목을 글을 실었다.오늘은 공관복음을 통해 왜 예수님이 그토록 그들에게 미움을 받고 살해당하기까지 했는지를, 그리고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길을 함께 성찰한다. 대사제 카야파가 말한 ‘여러분’과 예수님 사이는 말 그대로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이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로마 8,35)어쩌면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에 두 가지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우선 ‘애국심’을 들 수 있겠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사랑하는 ‘국가’가 무엇인가에 따라, 애국심이 자
* 이 글은 11월 11일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분향소 앞에서 봉헌한 미사의 강론입니다. ‘황당’과 ‘당황’의 차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차 뒤에서 숨어서 큰일을 보고 있는데, 그 차가 갑자기 출발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을 황당이라 하고, 그 차가 슬금슬금 후진할 때 느끼는 당혹감을 당황이라 한다는 이야기였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수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사람도 너무 많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워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너무 많다. 너무 많아서 탈이 날 지경이다. 그렇게 많은 예수님의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이 있으니, 그래서 여기저기서 곳곳에 천국의 표지들이 있으니, 천국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정
예수님께서는 열둘을 뽑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다.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성경 대목을 보면, 제일 처음에 소개되는 사도는 시몬이다. 그런데 이 시몬을 소개할 때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이라고 밝힌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사도는 ‘유다 이스카리옷’인데, 이번에는 “배신자가 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루카 6,14-16). 이 두 인물
10월 26일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다. 필자가 최근 사석에서 만나는 지인들에게 10월 26일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1979년의 그날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그러나 10월 26일은 그 1979년을 기점으로 70년 전 안중근(토마) 의사가 하얼빈에서 조선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誅殺)하고 체포된 날이기도 하다.필자가 안 의사의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