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신비’에 스물 일곱 번째 글을 올립니다. 이번 회가 이 공간에서 여러분께 글을 띄우는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생각과 언어를 가다듬는 쉼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제 글에 보여 주신 가르침과 격려와 공감에 감사드립니다.실은 ‘일상과 신비’ 뿐 아니라, 제 삶 자체에 잠시 쉼표를 찍으려고 합니다. 가르치던 학교에 휴직계를 냈어요. 대학
공교롭게도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불과 20여 분 떨어진 곳에 요 며칠 전 세계인의 공분을 사게 된 그 남자, 치과 의사이자 짐바브웨의 명물 사자 ‘세실’을 죽인 밀렵꾼 월터 파머의 병원이 있습니다.마침 부근을 지날 일이 있어 잠깐 들러 보았는데, 제가 도착한 시간에 시위는 없었지만 굳게 닫힌 병원 앞에 그를 비난하는 피켓들이 세워져 있고 기자들이 새벽부터
오래 기다렸던 만큼, 간절히 기대했던 만큼,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에 대한 반응이 지구촌 곳곳마다 뜨겁습니다. 이곳 미국도 예외는 아닌데요, 아마도 생태 위기가 초래된 데는 누구보다도 강대국의 과오와 책임이 크다는 것을 회칙이 직설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인지, 교계 언론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들이 진지한 분석기사를 쏟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종교관은 가톨릭뿐 아니라 이슬람교, 무속신앙, 불교, 유대교, 힌두교, 위카(Wicca), 무신론, 불가지론, 근본주의 개신교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입니다. 종교뿐 아니라 인종적,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미국인 대학생들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매 수업 설레고 긴장되는 모험이지요. 하지만 학생들이 ‘교양
밀린 일이 잔뜩 쌓인 책상 너머로 창밖의 봄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답답한 마음 가누기 힘들어 결국 밖으로 나섰습니다. “결코 전과 같지 않을 봄”이 되돌아 온 첫해입니다. 피어나지 못한 304명의 생명이 또다시 바다로, 바다로, 잠깁니다. 자식들이 죽어 간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자식의 명찰을 가슴에 건 어미와 아비는 삭발을 하고 아스팔트 바닥에 서서 캡사
프랑스의 풍자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참극으로 촉발된 논쟁들이 아직도 뜨겁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넓게 회자되며 대립각을 만들어 온 주제는 표현의 자유에 관한 것이었죠. 즉,“이슬람인에 대한 샤를리 에브도의 조롱이 너무 지나쳤다” 는 의견과, “표현의 자유는 무조건 수호되어야 한다”는 의견 간의 대립입니다. 이 주제는 사실 샤를리 사건을 이해하는 데 별로 큰
성탄 대축일 다음 날 아침의 어색하고 민망함, 다들 느껴 보셨을 겁니다. 전례력으로는 주님세례축일까지 약 2주 동안을 성탄시기로 경축하지만, 아무래도 성탄의 감흥은 전야와 당일에 대단원을 이루고 그 이후로는 식어 가지요. 상업주의로 변질되어 버린 세간의 성탄 다음 날은 더 삭막합니다. 마치 ‘그날’을 위해 일년을 기다려 왔던 듯한 모든 것들이 날이 밝음과
그 작은 성당에 저는 아직 가 보지 못했습니다. 사제가 되고 싶었던 착한 소년 성호 임마누엘의 이름을 가진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아름다운 성당, 예수를 닮은 목수들이 눈물과 기도로 나무를 다듬고 바닥을 깔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와 서까래를 올려 지었다는 그 성당 말입니다. 바다 건너 멀리 살고 있는 것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만, 성호의 성당이 축성되던 날은
가정에 관한 시노드 제3차 임시 총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중간 보고서 단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동성애 관련 조항—“동성애자에게도 은사가 있으며, 이를 통해 교회에 헌신할 자격이 있다”—은 최종 보고서에 결국 채택되지 못했습니다.큰 보폭의 변화를 기대했던 분들은 아마도 안타까워하셨을 터이고, 급작스런 변화를 우려했던 분들은 안도의 한숨
예은이 아빠는 오늘도 혹시 꿈속에서 예은이를 만날까 간절히 기대하며 단식과 회의로 지친 몸을 누인다고 합니다. 예쁜 아가, 미치도록 만지고 싶었던 예은이가 꿈길에 아빠를 마중 나왔다 수척해진 모습을 보며 많이 놀랄지 모르겠습니다.성호의 누나는 하루에 6시간씩 세월호 피해자들과 가족들을 비방하는 댓글들을 모니터링 한다고 합니다. “생각 없이” 쏟아 내었다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야 했는지, 누구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지 명확히 밝혀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말과 행동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의 자리를 메워 놓았습니다.사건의 원인도 정황도
올해 저는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성당 밖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환하게 밝혀 올 부활의 빛을, 제대에 장식된 화려한 꽃들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뉴스를 통해 소식은 들었겠으나, 무거운 제 마음을 헤아려 주기 힘들 미국인 교우들과 함께 대영광송을 부르며 그분의 부활을 축하한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
1991년 봄. 더위가 유난히 일찍 찾아 왔던 그 해 봄은 우울하고 두렵고 잔인했습니다. 그 봄에 우리는 많은 목숨들을 잃었습니다.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씨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사망했고, 이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와중에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잇따라 분신했지요. 그리고 5월,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
분명 보기에 불편했습니다. 지난 1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어린이들과 함께 날려 보낸 새하얀 비둘기들이 때마침 날아든 덩치 큰 까마귀와 갈매기에 의해 무자비하게 공격을 당했던 장면 말입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 더 마음을 꺼림칙하게 했던 것은 일파만파 인터넷에 회자된 사건에 대한 ‘해석’들이었습니다. 그 중 대다수는 하얀
참 오랜만에 고향의 겨울을 걷습니다. 13년만입니다. 그간 1년 혹은 2년에 한번씩은 꼭 다녀가곤 했지만 삼복을 낀 한여름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고향의 겨울이 얼마나 그리웠던지요. 추운 날씨에도 늘 붐비던 명동 거리,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종종걸음을 재촉하던 덕수궁 길, 불빛 따뜻한 낯익은 찻집들이 늘어서 있는 인사동 골목…&helli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인사말에 그토록 많은 사연과 안타까움과 기대가 담겨 있었는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한 대학생이 자신의 학교 후문에 손으로 써서 붙인 대자보에 손으로 쓴 답글 쪽지들이 붙고, 역시 손으로 쓴 답글 대자보로 이어져 다른 대학으로, 거리로, 고등학교로, 세대를 넘나들며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손 글씨 대자보는 문자와 사
우연찮게 라는 독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드니 간슬(Dennis Gansel) 감독의 2008년 작품인데요.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극적인 상상력을 보태어 만든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라이너라는 이름의 고등학교 교사가 한 학급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합
지난 봄, 신학개론 수업 시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학생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수업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질문했던 것은,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제가 가르치는 학교는 성 요셉 수녀회가 설립한 가톨릭 대학이지만, 학생들은 가톨릭,
폴란드 작곡가 헨리크 고레츠키(Henryk Gorecki, 1933~ )의 교향곡 3번은 ‘슬픔의 노래(The Symphony of Sorrowful Songs)’라고 불립니다. 고레츠키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 작곡한 진혼곡이지요.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악장의 소프라노 가사는 폴란드 성십자가 수도원의 애가(Lament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차갑습니다. 비가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입니다. 미네소타의 겨울은 길고 지루합니다. 10월 말에 눈이 오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매서운 날씨가 계속되지요. 이제 겨울 채비를 해야지 생각하니, 자주 찾아가지 못해 늘 송구스러운 ‘평화의 집’ (Peace House) 식구들이 떠오릅니다.미네아폴리스 ‘평화의 집’은 성요셉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