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간의 지상 순례를 마치고 포르티운쿨라에서 세상을 떠난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아시시로 돌아온다. 유해는 우선 성 다미아노에 들러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성 조르조(Giorgio) 성당에 안치되는데 이곳은 성인이 어렸을 때 교육을 받았던 곳이며 첫 번째 설교를 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성 클라라 대성전이 있는 자리가 본래 성 조르조 성당 자리였는
1224년 9월 라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은 프란치스코는 포르티운쿨라(Portiuncula)로 돌아온다. 포르티운쿨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 여기에는 본래 성모께 봉헌된 성당이 있었는데 성인의 시대에는 버려져 폐허로 남아 있었다. “가서 나의 무너져 가는 집을 다시 세워라”라는 소명을 받고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수리한 것이 1208년이었고 리보 토르토에 머물다
로마에서 프란치스코의 자취가 가장 뚜렷한 곳은 라테라노 대성전이다. 프란치스코는 1210년, 회규를 인준받기 위해 초기 동료들과 함께 이곳에 온다. 지금은 교황이 바티칸에 머물지만 당시에는 라테라노가 교황청이었던 것이다. 서기 32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축성한 라테라노 대성당은 1305년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교황이 머물던 곳이다. 성당
매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의 축일 저녁, 라베르나 수도원 식당에서 작은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의 고별사를 읽는다고 한다. 1224년 9월 30일 성인이 이곳을 떠나면서 했던 고별 인사를 맛세오 형제가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읽는 것이다.“... 우리들, 안젤로 형제, 실베스테르 형제, 일루미나토 형제와 맛세오 형제에게, 거룩한 오상을 남겨 준 참으로
순례자 숙소 앞을 거닐다가 휴스턴에서 온 마리아를 만났다. 젊었을 때 미국으로 이민한 그는 남편이 열 살, 네 달 된 아이 둘을 남기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32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며 혼자 살았단다.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아이들이 자라면 형편이 나아지리라 생각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어려움도 자랐노라고, 우리가
비비에나에 와서 버스를 탔다. 비비에나는 아주 작은 동네인데 버스 기사가 좀 딱딱해 보여서 함께 탄 할머니 수녀님에게 라베르나(La verna)에 대해 물었다. 초행길에서는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우왕좌왕 하다가 내릴 곳을 지나치기 십상이다. 혼자도 아니고 이곳 사정도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 둘 요량이었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안 하신다. 내가 뭘 잘못했
포조 부스토네리에티에서 버스를 탔다. 코트랄(Cotral)이라는 푸른색의 시외 노선 버스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버스를 타면서 기사 분에게 “포조 부스토네 가는데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요” 그랬더니 “걱정 말아요. 우리가 챙겨 줄 테니!” 하는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울린다. 앞에 타고 있는 승객들의 합창이다. 친절하고 인간미 넘치는 여기 사람들 모습에 나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오늘 가는 곳은 포레스타(Foresta), 포레스타의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는 곳이지만 보통 줄여서 포레스타라고 한다. 포레스타는 ‘숲’이라는 뜻이니 우리 식으로 하면 ‘숲 속의 성모 마리아’ 정도가 될까. 1225년 작은형제들의 보호자였던 우골리노 추기경의 주선으로 프란치스코는 리에티에 와서 휴양을 하게 된다. 성인의 건강이 극도
페루지아에서 굽비오로 가는 버스를 탔다. 끝없는 해바라기 밭 사이를 내달리던 버스가 굽비오에 도착한 때는 한낮. 뙤약볕을 받으며 광장의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맞은편에 장대한 성당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13세기 말 첫 번째 프란치스코회 출신 교황 니콜라오 4세 때 완성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이렇게 큰 성당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이곳의 국교였음을 새삼 상기하
그대 집 앞으로 나를 이끄는 / 길고 구불구불한 길.결코 사라지지 않을 길 / 전에 보았던 그 길이언제나 나를 여기 / 그대 집 앞으로 이끌어 오네.비틀즈의 노래 ‘길고 구불구불한 길(The long and winding road)’을 흥얼거리며 리보토르토(Rivotorto)로 가는 길을 걷는다. 리보토르토는 ‘구불구불한 냇물’이라는 뜻이다.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시내의 동남쪽 끝에 있는 문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를 지나 산 다미아노(San Damiano)를 찾아간다. 오래된 올리브 나무들이 햇살 아래 서있는 곳. 그 정경이 “이제부터 평화의 사도에게 당신을 안내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듯하다.창세기에는 홍수로 하느님이 사람들을 벌하셨던 때 세상이 온통 물속에 잠겨 생명의 기미가 없던 시간,
키에사 누오바 광장에서 아랫길을 따라 내려오면 ‘산타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이 나온 다. 우리말로 옮기면 ‘성모 마리아 대성당’ 정도가 될까. 과거에 아시시의 주교좌였던 이 성당 옆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에서 꼭 기억해야 할 장소인 주교관이 있다.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와 아들 프란치스코 사이에 재판이 있었던 곳
순례자 숙소에 짐을 풀었다. ‘레 스투오이에’(le Stuoie)라는 특이한 이름의 숙소다. ‘스투오이에’는 ‘돗자리’라는 뜻인데 초창기 프란치스코회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말이란다. 1219년(또는 1217년) 5월에 오천 명 이상의 형제들이 총회를 열었을 때 벌판에 나뭇가지와 돗자리를 엮어 지은 숙소에서 지냈기 때문에 그 총회를 ‘돗자리 총회’라고 부른다
첫째 날. 가까스로 열차를 탔다. 테르미니 역에 자주 왔던 터라 이곳을 잘 안다고 여겼던 게 화근이었다. 아시시 행 열차를 타는 곳이 오른쪽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출발 시간이 다 되었어도 플랫폼에 기차가 안 들어오는 것이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반대쪽이라는 게 아닌가. 아뿔싸! 출발이 임박했으므로 배낭을 지는 둥 마는 둥 한 채로 마구 뛰었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