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이곳에 처음으로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고민 끝에 강론을 쓰게 된 첫 이유는 저부터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 보고자였습니다. 그러기에 첫 글의 주제가 바로 ‘거리둠에 동의하기’였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에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만들려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각을 버리고, 내가 가진 경험을 버리고, 한발 더 물러서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내 생각 속에서 한계 지어진 주님
대학원 2학년 시절 여름방학 때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위해 한 달 피정을 갔습니다. 여름방학이면 본당 여름신앙학교나 다른 행사들로 바쁘게 지낼 시기인데 그 정점에 피정을 간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했지요. 부제품을 앞둔 시점이라 피정을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책도 이것저것 챙겨 갔습니다. 피정을 떠나는 시점에서 마저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지요. 피정 첫날 오후 지도 신부님께서는 피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잘 쉬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는 것에
신학교 입학하고 첫 수업이 철학입문이라는 과목이었습니다. 신학교 입학 전까지 그저 지식들을 외우고 시험 치는 것에 익숙했던 신입생들에게 철학이라는 과목은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첫 시간에 담당 교수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철학의 시작은 바로 의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왜?’라는 질문에 도출된 답에 다시 한번 ‘왜?’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하셨지요. 그렇게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우리가 잘 아는 르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를 비유로 설명해 주신 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의 시작이 알려주듯 저녁이 되었고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느님나라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도 조금 피곤하실 법합니다. 그렇게 이번 주일 우리에게 주어진 마르코 복음 4장의 끝부분은 무언가를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시작합니다.그러나 항상 모든 것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이지요. 늘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 뒤틀리거나 혼돈스러운 상황이 생기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외부적인 요인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요. 내가
최근에 겪은 먹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지난 주일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5년 넘게 사귀었던 대학교 후배랑 결혼을 한 것이지요. 친동생 부부의 결혼식을 주례하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미사를 공동 집전 해주신 신부님만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축하와 축복의 장이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동생 결혼 스토리가 아닙니다. 사실 저희 가족이 가장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는 손님들의 식사 문제였습니다. 다행히 결혼 직전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1.5단계로 하향되었지만 성당에서 혼배성사 후 하객들에게 식사를 대접할 수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활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지난 시간들 중 부활 대축일의 복음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주님 부활이 순간을 복음은 어떻게 전했는지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큰 내용은 알지만 복음 사가들이 그 순간을 어떻게 증언했는지 세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복음을 읽어 보았습니다.파스카 성야 미사에는 가, 나, 다 전례력에 맞게 공관 복음이 배치되는데 올해는 마르코 복음이 배치되었지요. 그리고 대축일 낮미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경상도에서만 살았다 보니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시공간을 따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흔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어린 왕자"를 지은 생택쥐페리가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봐도 모자란 세상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쉽
지금 사는 학습관에서 한때 제가 맡았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가축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소를 시작으로 하여 염소, 거위, 오리, 닭까지 있습니다. 평생 가축을 돌본 적이 없는 사제가 맡은 일 치고는 나름 가벼운 일은 아니지요. 동트는 시간에 맞춰 밥도 줘야 하고 물도 갈아 줘야 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밤새 아무 일 없이 잘 지냈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새끼 송아지 두 마리는 어미 곁에 잘 붙어 있는지부터 닭들은 알을 낳았는지, 염소들은 서로 안 싸우고 잘 있었는지 말입니다.각 동물 친구들의 머릿수를
해마다 주님의 부활을 맞으면 서로 ‘부활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형제분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부활 인사를 축하한다고 할까요?” 나에게 직접적으로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매년 전례적으로 기념하는 대축일인데 왜 굳이 ‘축하한다’는 말을 쓸까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 저녁 미사를 마치고 들어온 사제관에서 이 질문은 하루 종일 제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왜 우리는 부활을 축하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부활 팔일 축제 내내 하나의 묵상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이번 주일 복음을 묵상하고 난 뒤에 제 눈에 들어온 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로마 미사 경본",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2항) 너무나 길고 구체적으로 서술된 주님 수난의 여정을 읽었기에 묵상을 도울 수 있는 짧은 강론이나 침묵으로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이 긴 복음을 마주하신 여러분께 성주간을 시작하며 묵상할 수 있는 짧은 이야기를 드려 볼까 합니다.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내용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이사야서 66장의 말씀을 따온 이번 주 입당송과 같이 교회는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여라’ 주일로 보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장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찬 위로를 노래하는 것과 같이 이번 주일 전례는 부활의 기쁨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상징적 의미로 사제는 장미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릴 수 있고, 제대의 꽃 장식도 같은 맥락입니다. 대림 시기에는 절제적인 꽃 장식이
변화는 충격을 동반합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충격은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않습니다. 뭔가 후폭풍 같은 개념이겠지요. 내가 경험하는 변화의 규모가 작으면 충격이 작겠지만,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모양새로 그 변화가 다가온다면 그 충격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내가 변화함으로 인해 상대방이 나를 버거워 하거나 충격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다양한 빈도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변화는 여러 모양새의 충격을 동반한다는 사실입니다.충격의 정도를 결정짓는
얼마 전 혼자 기도를 하다가 온갖 분심에 휩싸여 견딜 수가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 많은 분께서 그러하실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기 참 힘들다.’ 함께하는 기도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적 전례의 특성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스스로 기도하는 것보다 따라가는 기도가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본당에 가지 못하고 방송미사를 보면서 분심이 든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기도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처럼 ‘외딴곳’ (마르 1,45)을 찾아야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절대자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호기심인 동시에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절대자는 물리적 의미의 왕과 같은 지배자와 신앙적 의미의 신을 모두 포함합니다.) 어떤 존재일까 궁금하지만 그 절대자에게서 나오는 영향력이 내 삶에 너무나 치명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주일 말씀 외에 가장 적절한 예로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그분의 면모 모습을 마주한 제자들은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이후 들리는 하늘의 목소리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
신앙생활 잘 이어 나가고 계십니까? 사제인 저 역시 교우 분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속이 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탄을 맞았고 새해를 맞았습니다. 지난 주일 성탄 시기를 끝내는 주님 세례 축일 지내며 앞으로 맞을 연중 시기를 통해 주님의 공생활을 묵상하게 됩니다. 전례력으로 나해인 올해는 연중 주일 복음으로 마르코 복음이 배치되어야 하지만, 주님 공현 대축일과 세례 축일의 큰 주제인 주님의 드러나심을 계속 이어 강조되기 위해 요한 복음이 등장합니다. (
성탄 시기의 한가운데, 이번 주일 교회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냅니다. 성탄 대축일이 목자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그 메시아가 오셨음이 강조되는 날이라면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께서 동방박사 세 사람으로 상징되는 모든 민족에게 당신을 드러내심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교회의 전통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황금, 유향, 몰약)의 수에 따라 그들이 3명이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일 본당 제대 앞에 놓인 구유에 작은 변화가 있는데 바로 동방박사 세 사람이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대림 마지막 주일입니다. 부활 대축일 미사를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성탄 대축일 때는 달랠 수 있을까 했는데 지금 상황으로는 성탄 대축일도 각자의 본당에서 드리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저 역시 제가 머무는 이곳에서 조용히 성탄을 보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일까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얼마 전 홀로 미사를 드리면서 주님께 던졌던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아쉬움 가득한 한탄이라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지난주 이주형 신부님께서 인내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저 역시 이번 주일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주일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하는 순간 잠시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제 서품모토인 구절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이사 40,1) 통상적으로 제2이사야서라고 불리는 ‘이사야 예언서 2부’의 첫 구절입니다. 위로의 책이라는 별명이 있는 이사야 예언서 2부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전하는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이사 49,13)라는
무언가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맡은 부분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일을 할 때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분도 계시고, 뒤에서 받침해 주는 역할을 선호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분명한 것은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 책임을 맡는다면 그 부담은 조금 감소하겠지만 나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주어질 때 우리는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곤 합니다.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본당 보좌신부 시절 나는 이때쯤 뭐하고 있었을까 생
1독서 -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묵시 7,4)모든 성인 대축일에 듣는 요한 묵시록의 말씀은 ‘나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희망을 던져 줍니다. 묵시록에서 언급되는 십사만 사천 명은 모든 민족을 의미합니다.(12지파를 상징하는 12를 곱해서 거기에 1000을 다시 곱한 숫자) 신천지가 말하는 선착순 게임이 아니라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다는 메시지는 모든 성인 대축일에 그 의미가 각별합니다. 우리 역시 그들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